| [본사 창사30주년 릴레이 에세이](14) 김용철 한겨레 기자 나를 키운 8할 |
| 2021년 04월 21일(수) 2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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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외환위기 때였습니다. 입사한 지 두해 지나 닥친 금융위기는 지방언론사에 혹독했습니다. 임금삭감으로 최저생계비에 못 미치는 월급으로 버텨야했습니다. 구조조정 바람도 비켜가지 않았습니다. ‘나만은 대상이 아니길’ 불안이 똬리를 틀었습니다. 편집국에 정적이 짙게 내려앉았습니다. “막내니까 걱정 안 해도 돼”라는 선배들의 말은 위안이라기보다 누군가 대신 화살을 맞아야 하는 운명을 뜻했습니다. 사원들 투표로 정리해고 안건이 가결될 때, 한 선배는 눈물로 구제를 호소했습니다. 살아남았다는 미안함이 짓눌렀습니다. 떠나고 싶었습니다.
좋은 선배들이 많았습니다. 밥 잘 사주는 선배들이었습니다. 사는 형편이라야 어금버금했을 텐데, 언제든 지갑을 열었습니다. 호의를 받으면서도 선배들에게 가시 돋친 말을 많이 했습니다. “신문을 이렇게 만들어도 됩니까. 부끄럽지 않습니까.” 모기업의 방패막이가 된 기사에 화가 났습니다. 저널리즘의 기본을 버린 모습이 못마땅했습니다. 선배들이라고 마음 편했을까 싶지만, 그땐 그렇게라도 뱉지 않으면 버티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적당하게 타협하고 사는 선배들의 비겁함을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선배들은 때론 들어주고, 때론 항변하며 거칠게 말을 섞었습니다. 참 뜨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그 치열함을 안고 광주를 떠났습니다.
서른, 광주매일을 떠나 한겨레신문에 새 둥지를 틀었습니다. 언론사 지망할 때부터 목표에 둔 신문사에 가게 된 기쁨은 컸습니다. 일은 서툴렀지만, 도전하는 시간이 행복했습니다. 그렇게 지낸 지 1년 여, 광주매일에서 투쟁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노동조합은 파업을 했고, 회사는 직장폐쇄로 맞섰습니다. 그 험한 시간을 어떻게 버티고 있는지, 사랑하는 동료의 얼굴이 눈에 밟혔습니다. 고소·고발로 재판까지 받게 되고 결국 신문사 문을 닫게 된 소식에 가슴이 저몄습니다. 하루아침에 일터를 잃은 막막함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요. 들리는 소리는 원망과 희망이 교차했습니다. 원망은 가까웠고, 희망은 멀었습니다. 모두 깊게 내상을 입은 채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직장인이기 전에 기자이고 싶었던 꿈들이 뒤엉켰고, 냉정한 현실은 늘 절망이 더 가까웠습니다. 전 뛰쳐나왔지만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동료들은 차가운 거리로 내몰렸습니다. ‘다른 신문’을 만들겠다고 분주했던 동료가 있었고, 새 일자리를 찾아 나선 동료가 있었고, 공부를 다시 시작한 동료가 있었습니다.
누군가 복간을 추진한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떠났던 사람들 일부가 새 옷을 입은 광주매일신문이라는 울타리에 다시 터를 잡았고,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지금의 꼴을 갖추게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다녔을 때 함께 했던 동료들의 이름이 있고, 또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와 신문과 방송을 만드는 일에 애쓰고 있습니다.
추억하는 일이 고통이었습니다. 30돌에 아픈 상처를 다시 들추는 것이 조심스럽지만 용기를 냈습니다. 상흔으로 남았던 시간을 똑바로 대면하지 않고는 행복하고 즐거웠던 시간조차 지워질 것 같아서입니다. 모두 젊었기에 뜨거웠고, 넘치는 열정을 주체하지 못해 서툴기도 했습니다. 광주매일에서 4년5개월 동안 배운 ‘기자의 삶’은 지금도 저를 지탱하는 힘입니다. 치열하게 살았던 그 시간은 돈으로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원고를 청탁하는 전화를 받고 기꺼이 응했던 까닭은, 마음 깊숙이 묻어둔 과거를 토해내야 나도 더 건강하게 살 수 있겠다는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실컷 울었어야 했는데 때를 놓쳐버렸습니다. 그늘에 숨겨둔 마음을 쏟아내야 봄날 햇볕을 맘껏 쬘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오랜만에 광주매일을 들여다봤습니다. 20대 청춘을 보낸 곳, 다시 설렜습니다. 마감 뒤 땀 식혔던 호프집, 동료들과 다녔던 남도답사, 쓰린 속을 달래준 구내식당 라면을 잊을 수 없습니다. 광주를 떠난 지 20년이 넘었지만 광주터미널을 오갈 때면 지금은 사라진 허름한 신문사 건물이 떠오릅니다. 나를 키운 8할이 머문 곳, 떠나보낸 첫사랑이었지만 마음에 오래도록 남은 젊은 날의 초상. 창간한 지 서른 해 되었지만, 멈춰버린 그 한 해는 한여름 폭풍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