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시대의 상상력 / 천세진
2021년 04월 25일(일) 18:47
천세진 문화비평가·시인
줄리언 반스는 저서 ‘10 1/2장으로 쓴 세계 역사’에서 “재난은 예술화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재난을 줄이는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재난을 풀어놓은 것이고, 확대시키는 것이고, 설명하는 것이다. 재난은 예술이 되었다. 결국 그것이 재난의 존재 이유이다”라고 썼다. 줄리언 반스의 말은 냉소적으로 다가온다. 예술이 된 것이 재난의 존재이유라니? 너무 심하지 않은가! 그의 말이 심했다고 공박하려면 그럴 만한 증거들이 필요하다. 현재 전 세계가 재난 상태에 있으니 이보다 더 나은 현재적 증거를 찾기 어렵다.

줄리언 반스의 재난에 대한 해석은 테오도르 제리코(1791-1824)가 1819년에 그린, 낭만주의 회화의 효시로 불리는 작품인 ‘메두사 호의 뗏목’에 붙인 것이다. 메두사 호 사건은 실제 있던 일이다. 1816년 7월2일 식민지 개척을 위해 세네갈로 떠난 해군 군함 메두사 호가 난파했다. 선장과 상급 선원, 일부 승객은 6대의 구명보트로 대피했지만, 나머지 149명은 뗏목을 만들어 탈출해야 했다. 뗏목을 구명보트에 매달아 끌기로 했던 선장은 줄을 자르고 도망갔고, 13일 동안 물과 식량이 없이 표류한 이들의 뗏목은 폭동, 광기, 식인의 생지옥을 연출했다. 구조될 때까지 살아남은 이는 15명에 불과했다. 메두사호 사건은 무능한 왕당파가 왕정복고기에 일으킨 인재였고, 프랑스 정부는 생존자였던 메두사호의 외과 의사가 비극의 전모를 밝히기 전까지 사건을 은폐하려 했다.

재난을 기록한 ‘메두사 호의 뗏목’이 낭만주의의 효시가 되었다는 점이 궁금하지만, 그건 차치하고, 지금의 코비드(COVID) 상황도 시간이 흐른 뒤에 문학, 미술로 다루어질 것이다. 이미 그런 작품들이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재난의 실상은 문학적이지도, 예술적이지도, 미학적이지도 않다. 재난을 담은 예술이나 문학은 다른 상황을 주제로 한 작품을 볼 때와는 다른 시각이 필요하다. 현재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서서, 눈에 보이는 현상이 연결된 과거와 미래까지를 모두 들여다보아야 한다. 재난이라는 이름의 풍경은 이미 지난 시간 속에서 잉태된 것들이고, 세계를 채웠던 신음과 비명의 잔향(殘響)은 그냥 사그라지지 않고 끝내는 미래를 바꿀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한 시대, 한 세계를 책임진 사람들은 재난 속에서 허덕이는 것만으로도 진력을 소진하게 될 평범한 이들보다 더 크고, 엄중하고, 확장된 상상력을 갖추어야 한다. 문학적 상상력이나 예술적 상상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시대와 세계를 책임진 사람들은 정치인들일 텐데, 그들에게 언감생심 소설을 쓰고 그림을 그리라고 요구하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역사적 상상력을 가지라는 것이고, 하나의 현상이 원인과 결과라는 양 날개를 갖고 있다는 것을 상상하라는 것이다. 역사적 상상력이 없으면, 현상을 일으킨 뿌리가 번지고 얽히는 리좀(Rhyzome, 지하경, 들뢰즈와 가타리의 공저 ‘천 개의 고원’에 등장하는 용어)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얽히고설킨 관계의 맥락을 알지 못하니 난맥상을 풀어내지 못한다. 그런 상상력의 부재를 정치 용어로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멍청함’, ‘우둔함’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런 정치 용어는 없다고? 그런데 왜 정치를 보면 자꾸 그 용어가 떠오를까?

뿌리를 가진 현상은 단번에 사라지지 않는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칼로 내리친 알렉산드로스의 방법은 그냥 전설일 뿐이고, 현실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 현상의 깊은 곳을 건드리지 못하고 변죽만 만지작거리는 것은 치유의 메스놀림이 아니고, 깃털 놀림에 불과하다.

인류가 재난을 겪으면서도 계속 이어져온 것은 다양성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세계화를 찬양하고, 단일한 세계가 되고 있어 편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의 세계화는 다양성을 말살한 단순화와 동의어이고, 그건 아주 위험하다. 재난 시대를 맞은 우리의 풍경에서도 그런 현상이 불거져 보인다. 정치를 비롯한 숱한 분야에서 두 개의 경우만을 놓고 다투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이나 상상력이 졸렬하다는 증거이고, 적과 동지로 구분하는 생각은 최악의 상상력 부재 현상이다. 상상력 부재는 결국 사회를 사막화한다. 제발 지평을 넓히는 상상력을 좀 가지시라! 눈앞의 현상에만 허덕이는 무사유의 팬터마임은 이제 그만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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