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마당]푸른 길에서 / 수필 김종훈

2021년 05월 10일(월) 20:47

길도 푸르고 나무도 푸르고 하늘도 푸르다는 푸른길이 우리 동네 앞을 지나간다.

계림에서 남광주 거쳐 진월까지 10여 마을을 굽이굽이 돌고 돌아 8천 미터 기찻길 그때 그 노선, 경전선 철도 도심구간 폐선 부지를 시민들에게 돌려주어 만든 길이니 시민 모두의 길인 셈이다.

길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이동의 무대요, 보행의 편의시설이며 오늘날은 건강관리의 수단으로까지 발전했다. 둘레길, 올레길, 산들길 길 천지 나라에 살다 보니 덩달아 우리 동네 푸른길도 멋진 길, 아름다운 길로 등장했다. 나의 건강관리에도 자나 깨나 걷기운동이 제격이니 오전 한나절은 산을 걷고 오후 석양쯤에는 푸른길 산책이 일상화되고 말았다. 푸른길은 여명에서 야음까지 온종일 열려 있는 마실 길이고 만남의 광장이다.

오늘도 저물어 가는 나의 시간은 즐겁고 보람차다. 보름달 계수나무 아래로 반짝이는 별빛이 황홀하고 청춘남녀들의 미소가 가을 국화처럼 하얘가는 초저녁 푸른길 때문이라 할까. 집 앞 나들목에서 광주역까지, 광주역에서 다시 집 앞까지 한 시간 반, 가족끼리, 연인끼리 어르신도 어린이도 함께 걷는 화합의 장이요, 노소동락의 한마당이다. 다문다문 반달 모양의 벤치에는 노파들 애환의 목소리가 넘쳐나고, 그늘막 정자에서는 바둑 두는 소리와 장군 멍군 장기 두는 소리로 진종일 법석인다.

밤사이 봄비가 촉촉이 지나간 5월 어느 날 아침 햇살은 유난히도 화창했다. 이날은 마침 공휴일이고 애들에게는 특별한 날이기도 했다. 버릇처럼 배낭 메고 나가던 오전 산행을 접고 아침 일찍 5학년 외손녀와 그 오빠에게 외식이나 하자고 점심 약속을 했다. 숟가락 하나 더 얹으면 된다는 식의 아내 성화에 못 이겨 범위가 좀 더 커졌다. 두 식구 합치면 모두 여섯, 메뉴는 애들 취향에 맞추어 양식(칼질)으로 하잔다. 이 뜻깊은 날 손주들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나니 모처럼 이 할애비 할매의 지지도가 아이돌의 지지도만큼이나 오른 것처럼 화기애애하고 고무적이다. 아! 지금이 오월인가? 모든 분위기가 녹음의 계절로 무르익어 봄날답게 화창했고 봄꽃처럼 화사했다.

애들 식구가 다녀간 뒤 오후 느지막하게 혼자 푸른길로 나섰다. 그날따라 푸른 길엔 젊은 엄마들이 데리고 나온 어린애들로 붐볐다. 푸르름이 짙어가는 나뭇가지 사이로 허름한 집들의 담장 너머 산딸나무 하얀 꽃이 나붓거리던 구멍가게 근처였다. 광주역 방향으로 걷고 있는 이 길목에서 맨땅에 주저앉아 엉엉 울고 있던 어린아이를 목격했다. 서너 살 정도로 보이는 여아가 글썽글썽 눈물을 닦으며 부들부들 혼자 떨고 있는 것 아닌가. 10여 미터 전방에서부터 봤지만 근처에 가족처럼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해가 노을 속으로 빠져드는 운동하기 좋은 시간, 오는 사람 가는 사람도 많고 지나가는 엄마들도 많았건만 모두가 앞만 보고 부산할 뿐이다. 보호자도 없이 혼자 흐느끼는 아이의 위중함에도 어느 누구 하나 뒤돌아보는 여유는 없었다. 아니! 5월이 무슨 달인데? 오늘이 어떤 날인데? 설령 무슨 날이 아니더라도!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서는 내 앞에서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우리 할머니 못 봤어요? 으아앙” 또 한번 울음이 터져 나온다.

한 발짝 더 다가앉아 아이의 여린 고사리손을 덥석 쥐면서 그의 젖은 얼굴에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자다 일어나 보니 할머니가 없으셨어?” 하고 물었다. “화장실에 있다 나왔는데 할머니가 없어졌어요.” 하며 또 한 바탕 울음이다. “집은 어데야?” 물었지만, 손가락으로 어물쩍 가리키다 만다. “엄마는?” 해도 즉답이 없다. “할머니 잠깐 마실에 갔겠지” 하면서 울음을 멈추도록 안심시켰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내 손주들에게도 하지 못한 아양을 떨 수밖에 없었다. 그 할머니가 빨리 나타나기를 기다리면서 지연작전을 펼쳐야만 했다. 계속 울먹이는 아이를 어루만지면서 “머리도 예쁘게 묶었네. 멋진 반지도 꼈구나. 할머니가 사준 거야?” 자문자답하듯 중얼거리며 대화 아닌 대화를 이어가고 있을 무렵, 근처 2층 계단을 내려오던 한 여성이 갑자기 큰 소리로 애 이름을 부르며 나타났다. 할머니라고 보기엔 너무 젊어 보여 “저분 할머니 맞아?” 했더니 벌떡 일어나 언제 그랬냐는 듯 그 계단 쪽으로 뛰어가는 것 아닌가. 계단 아래로 내려오던 그녀는 아이를 향해 “너 거기서 뭐해?” “저 사람 누구야?” 투박하고 신경질적인 질책을 날렸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는 그녀의 날카로운 눈살이 나에게로 향했다. 정머리 뚝뚝 떨어지는 눈초리와 싸늘하고 앙상 맞은 언동에 놀라 나도 언제 그랬냐는 듯 발걸음을 재촉하고 말았다.

때마침 온 나라 곳곳에서 형형색색 축제의 마당이 한창이다. 공원을 걸으나, 도로를 달리나, 빨강, 주황, 하얀 철쭉이 지천이다. 5월 영령들의 운정동 거리에도 흐트러진 하얀 이팝나무 꽃물결이 밤새도록 검은 리본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푸른 숲 사이의 푸른길, 누군지도 모를 천진난만한 네 살배기 그 여아의 앞날에도 꿈과 희망이 샘솟고, 그 길섶 가녀린 꽃잎들도 밤하늘의 폭죽처럼, 정월대보름 달집처럼 붉게 붉게 피어났으면 한다.

<김종훈 약력>
▲2014 대한문학 시, 2019 아시아 서석문학 수필 등단
▲광주문인협회 · 아시아서석문학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