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도(蘇塗)의 거주자들 / 천세진 |
| 2021년 05월 23일(일) 19: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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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시대에 ‘소도(蘇塗)’라는 곳이 있었다. ‘삼국지’ 위서(魏書) 한전(韓傳)에 가장 자세한 내용이 실려 있다는데, 범죄를 저지른 도둑이 그곳으로 도망가더라도 잡을 수 없는 치외법권 지역이다. 천신께 제사를 지내는 천군(天君) 관할 지역이었고, 바깥 지역과는 다른 법에 의해 관장된 지역이었다.
시절이 수상하고 막중한데 뜬금없이 ‘소도’ 타령이냐고 하겠지만, 우리 사회에 엄연히 ‘보이지 않는 소도’가 존재하기 때문에 소도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소도의 탄생은 인간의 통치와 천신의 통치라는 이중적 시스템이 공존했던 때문이었다. 그 이중적 체계가 하나의 체계로 수렴되면서 ‘소도’도 사라졌다. 공간적으로는 사라졌지만, 비공간적인 영역에서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제왕적 권력이 존재하는 시대에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소도’가 존재했고, 지금도 여전히 존재한다.
‘현대적 소도’로 가는 통로 중 하나가 대통령의 사면권이다. 사면권은 지나치게 가혹한 법적 잣대로 인한 사회적 질식을 막는 숨통의 역할을 위해서 탄생했겠지만, 그동안의 사면이 사회적 숨통 역할을 했는지는 의심이 든다. 한국의 형법이 지나치게 가혹하지도 않았고, 사면이 힘없는 서민들을 위해 사용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면권’의 남용 정도는 한 사회의 선진성과 후진성을 가름하는 기준이 될 수도 있다. 대통령이 사면권을 과도하게 사용하는 것은 법을 넘어선 권한이 과도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법을 무력화할 수도 있다. 그런 사회는 후진적이다. 법치주의를 표방하는 사회라면, 사면권 행사는 최소한이어야 한다.
한국은 그동안 사면권을 과도하게 정치적으로 사용했고, 그 때문에 만들어진 ‘사회적 소도’가 엄청난 크기가 됐다. 정치인들이 서로를 겨냥하여 ‘적폐’라고 비난하지만, ‘사면’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그들이 바로 ‘적폐’고, 소도의 거주민이다. 그들뿐만이 아니다. 법조권력도 있다. 정치인들이 난장판을 만들었다 해도 법을 곧이곧대로 적용했다면 난장판은 최소화되었을 것이다. 오히려 법조권력은 자신들에게는 법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사회적 소도’를 만들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소도 안에서 누리는 치외법권적인 삶이 문제가 될 것 같아서인지 언론권력도 소도의 주민으로 함께 머물게 해주었다.
만약 전두환을 위시한 5공 세력에게 사면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국론이 분열되어 나라가 망했을까? 아니, 우리의 현재는 훨씬 나아졌을 것이다. 도덕적으로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더 나아졌을 것이다.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의 사면을 거론하면서 또다시 ‘국민 통합’이 거론되고 있다. 법으로 심판받은 이를 풀어주고, 그들을 지지하는 세력을 포용하는 것이 어떻게 ‘국민 통합’에 해당되는지 의아하다.
사과와 용서를 전제로 한다는 말도 있던데, 용서의 주체도 참으로 기이하다. 용서는 피해자가 하는 것이지, 정치인과 대통령이 제멋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광복절 특사니, 성탄절 특사니 해서 범법자들이 사면을 통해 우르르 쏟아져 나오고는 하는데, 그들이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고 용서가 이루어져서 사면을 받은 것인지 궁금하다. 어차피 사면이 정의로운 것은 아니지만, 가해자와 정치권이 합의한 사면은 정의와는 정반대 지점에 있을 뿐이다.
법은 엄정해야 하고, 최대한으로 존중받아야 한다. ‘사면’은 존중해야 할 법적 결정을 무력화 시킨다. 사면권을 최소한으로 제한하고, 중대 범죄나 정치인에 대한 사면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도록 법을 개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절대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소도’ 안에서 편안함을 누리고 있는 정치인들에게 그 결정권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슬프고, 절망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