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마당] 모정(慕情)의 할미꽃 / 수필 - 김익환 |
| 2021년 06월 07일(월) 19: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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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에서 게으름 꽃만 피우고 있는 내게 자극이라도 주려는 것일까? 2층으로 오르는 계단 한쪽에 놓인 자그만 화분을 가득 채운 할미꽃 십여 송이가 겉늙음이 부끄러운 듯, 한결같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 모습들이 마치 어머님 생전에 즐겨 다니시던 경로당을 옮겨 온 듯하다. 몇 해 전 조부모님 산소에서 옮겨다 심은 것으로 ‘이식(移植)을 하면 발육이 안 돼 죽는다’고 하는데 나의 정성이 고마워선지 잘 자라주고 있었다.
수많은 꽃 중에 꽃잎의 겉과 속이 이리도 다른 꽃이 어디에 또 있을까? 양지바른 계단이라 봄 햇볕이 따가운데도 아직 추위를 덜어내지 못한 것일까. 꽃잎 표면은 솜털 같은 흰색 털모자를 쓰고 있는데 내면은 금방이라도 선혈을 토해낼 것 같은 검붉은 색으로 치장을 하고 있다. 꽃대 대부분은 허리가 휘어져 고개 숙인 꽃송이가 화분 언저리 밑으로 처져 힘들게 매달려 있고 꽃잎 떨군 꽃자루엔 수많은 꽃술만 둥근 해파리처럼 달려있다. 그 촉감은 어릴 적 만져본 어머님 젖가슴처럼 부드럽고 윤기 없는 하얀 솜털은 그분의 흰머리를 연상케 한다.
일명 ‘백두옹’(白頭翁)이라고도 하는 할미꽃은 아무도 눈여겨 보아주지 않는 외딴 양지바른 곳에 많이 서식하는데 무슨 수줍음이 그리 많은지 꽃잎을 열기 전부터 고개를 들지 못한다. 그렇게 줄기는 휘어졌어도 뿌리는 곧고 깊게 뻗어 내린다. 꽃잎 색깔이 겉과 속이 다르듯 줄기와 뿌리도 이중성을 지니고 있는데 꽃과 뿌리는 초식동물이 먹을 수 없는 강한 독성을 품고 있어 뿌리를 찧어 하수구에 투여하면 해충도 서식하지 못한다고 한다. 반면, 한방(韓方)에서는 백두옹(白頭翁)이라는 약재로 건위제, 소염제, 지사제, 지혈제, 진통제로 쓰이고 민간요법으로는 학질과 신경통 치유에 쓰인다고도 한다.
사람도 살다 보면 원수가 은인이 되고 은인이 원수가 되는 경우가 있듯 할미꽃도 그가 품은 독(毒)이, 성한 사람에겐 해(害)가 되지만 한방에서는 병자를 치유하는 약제로 쓰이고 있으니 그 숨은 속내를 누가 쉽게 간파할 수 있으랴! 그래서 ‘이은상’ 시인은 할미꽃을 두고 ‘겉 보고 늙었다 마오. 마음속 붉은 것을/ 해마다 봄바람에 타는 안을 끄지 못해/ 수심에 숙이신 고개 어느 분이 알리오.’라고 읊었는지 모를 일이다. 내가 할미꽃을 집안에 옮겨 심은 연유도 그 특성이 어머님의 삶과 궤를 같이하고 있는 유사성을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열다섯 살, 앳된 소녀가 앞 뒷산 봉우리가 구름 한 점으로 이어지는 첩첩 산골 가난한 집안의 외아들에게 시집와서 서른을 갓 넘은 나이에 청상(靑孀)이 된 어머님이시다. 그분이 변변한 유산 하나 물려받지 못한 채 여섯 살배기에서 젖먹이까지 3남매를 홀로 품어 안았을 때 어린것들 지키고 키워내고자 다잡은 독한마음이 어찌 할미꽃의 독성만 못했으랴! 험한 세상 홀로 헤쳐 나온 삶의 의지는 할미꽃 뿌리의 곧고 깊게 뻗음의 닮음이요, 험난한 세파에 행여 어린 자식들 다칠세라 노심초사 마음조이며 지켜 주신 은덕 또한 한방에서 갖가지 질병을 치유해주는 할미꽃 뿌리의 약성만 못했겠는가! 그런 삶이 쌓이는 동안 당신 가슴속엔 검붉게 피 맺힌 한이 서리고 허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시위 당긴 활처럼 휘어지셨으리라.
딸자식 키우느라 고생하고 사시면서 생활이 궁핍하고 삶이 고달플 때면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 “언제나 허리 한번 쭉 펴고 살 거나!” 탄식하시던 어머님, 당신이 일하지 않아도 생활의 허리가 펴지니 당신의 진짜 허리 깊게 휘어지시고 그 허리 펴지는 소망 그리도 간절하시던 어머님! 그 어머님은 끝내 육신의 허리를 못 펴신 채 당신의 한 많은 생에 대한 애착도 자식에 대한 애증도 모두 떨쳐내시고 미수(米壽)를 끝으로 파란만장한 할미꽃 인생을 접으셨고 그 세월이 올해로 강산이 어언 두 번의 변화를 마쳤다.
가슴에 사무치는 그리움이 나를 화분에서 밀쳐내며 화분을 붙들고 청승만 떨 거냐고 핀잔을 준다. 쫓기듯 거실로 내려와 탐스럽게 피어 있는 주황색 군자란꽃 두 송이를 싹둑 잘라 집 앞 담장 위에서 5월 맞이를 서둘고 있는 붉은 장미 몇 송이를 꺾어 함께 묶고는 ‘어디 가냐?’는 아내의 물음에 대꾸도 안 한 채, 담양 천주교 공원묘역으로 차를 내몰았다. ‘섯밭 댁’과 ‘익환’이 어머니로만 불리느라 73년을 숨겨두었던 당신의 성명 석 자를 이승 길 떠나면서야 되찾아 ‘靑청松송沈심氏씨 沈심貴귀順순之지墓묘’라 써 놓은 문패 앞에 꽃다발을 바쳤다. 큰절 두 번 올리고 “어머님 저 왔어요.” 하니 귀에는 안 들려도 “잘 지냈냐? 너도 많이 늙었구나.” 하시는 말씀이 허공의 기류(氣流)를 타고 큰 울림으로 가슴을 파고든다.
어머님은 그렇게 야윈 몸 들여놓은 차디찬 석관 속에서 허리 펴는 지팡이도, 그토록 애면글면하시던 자식들의 안위도 다 내려놓으시고 당신의 손녀들이 낳은 증손주들의 재롱 한번 보여드리고 싶어 하는 이 자식의 소망도 아랑곳하지 않으신 채, 당신의 묘비(문패) 옆에 새겨진 우리 삼 남매의 이름만 보듬어 안고 저승의 할미꽃 뿌리 되어 곧고 깊게 쉬고만 계신다.
<김익환 약력> ▲월간 수필 문학 천료 등단(2001)
▲징검다리 수필문학회, 광주수필 문학회 회장, 수필 문학 추천작가회 이사 및 부회장 역임
▲광주 문인협회 이사(현) 한국문인협회 회원
▲수필집 ‘백련 꽃 여인’(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