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매일신문 창사 30주년 특집]창간정신으로 본 광주매일 “명인이 살아야 명산…내일도 이어 자라야” 김중배 칼럼…1991년 11월2일자 5면 특별기고 ‘진정 무등을 사랑하거든’

2021년 06월 08일(화) 19:33

1991년 11월1일 창간호를 발간한 광주매일신문은 30년 동안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다양한 어젠다를 제시해 왔다. ‘인재를 키우자’라는 캠페인은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1991년 11월2일자 5면에 실린 김중배의 특별기고 ‘진정 무등을 사랑하거든’에는 인재 육성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김중배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명제가 있다. 지역발전을 원한다면 인재를 키워야한다는 어젠다도 그 중 하나다. 30년 전 광주매일이 첫 선을 보일 때, 지역에 제시한 명제는 ‘인재를 키우자’였다. 시대의 대표 논객, 김중배 선생은 1991년 창간 칼럼 ‘진정 무등을 사랑하거든’이라는 제하의 칼럼을 통해 인재를 키우자고 강조했다. 30년의 시간이 지나갔지만 여전히 유효한 그 글을 다시한번 되새김하며 광주매일신문 창간 정신을 떠올린다. /편집자주

-명인이 살아야 명산-
“봉우리가 높다 해서 명산이 아니다. 그 아래 명인이 살아야만 명산이 된다. 물이 깊다 해서 거저 신령한 건 아니다. 그 깊은 곳에 용이 살아야만 신령한 물이 된다.”

‘고문진보(古文眞寶)’에도 나오는 당나라 시인 유우석(劉禹錫, 772-842)의 ‘누실명(陋室銘)’은 이렇게 비롯된다. 유우석이라면, 천년도 훨씬 넘는 옛날 옛적의 사람이다. 당연히 그의 누실명도 천년 저쪽 무덤속에 묻혔어야 옳을 법하다. 그러나 오늘에도 그의 문장은 나날이 돋는 해와 더불어 나의 머리 위로 떠오른다. 오늘 광주매일의 그 이름처럼, 날이 날마다 떠오른다.

왜 그의 문장은 죽지않고 새록새록 떠오르는가. 눈이 밝은 이들은 이미 그 까닭을 짐작했을 터이다. 우리 고장 남도, 빛고을의 사람들은 유달리 우리의 명산 무등을 사랑한다. 우러른다. 고향을 떠난 타관살이의 나그네들은 더욱 그 사랑에 주리고 더욱 그 우러름에 목이 탄다. 때문에 한 두 사람만 모여도 무등의 이름을 내건다. 산악회에도 무등이 붙고, 이런저런 친선의 모임에도 무등의 간판이 스스럼없이 걸린다.

심지어 무등이 보이는 산자락에서 자라난 언론인들의 모임에도 무등의 이름이 붙여진다. 무등(無等)언론인회, 그걸 줄이면 ‘무언회(無言會)’가 된다. 직역하면 말이 없는 모임이 아닌가. 언론인들이 말을 잃다니, 어림없는 이름이라는 반론이 일어도 막무가내다.

‘대성(大聲)은 무성(無聲)’이므로 ‘대언(大言)은 무언(無言)’이라는 짜장 현학적인 논리마저 내세우면서 우겨대는 데는 반론의 목소리도 잠들어버리고 만다. 한마디로 어거지다. 그러나 그 어거지속에서 우리는 무등에 쏠리는 가없는 사랑과 우러름을 확인하며, 뜨거운 공감의 여울목에서 서로의 손을 마주잡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도 우리의 무등이 명산임을 고집한다. 우리의 무등이 어제와 오늘만이 아닌 영원의 명산이기를 기구한다. 그러나 그 고집과 기구가 깊을수록 어쩔 수 없이 마주치게 되는 문장이 유우석의 누실명(陋室銘)이다. 그의 문장대로 어제와 오늘, 그 산자락 아래 명인들이 자라왔으므로 무등은 명산이었을 터이다. 그렇다면 내일과 또 그 내일에도 명인들이 이어 자라나야만 우리의 무등은 영원한 명산이 된다. 그 간절한 기구의 반사가 바로 누실명(陋室銘)의 새록새록한 떠오름이 아니던가.

-‘사람가난’의 상대적 빈곤-
분명히 말해두고자 한다. 이건 광주매일의 탄생이 촉발한 섬광과도 같은 발상이 아니다. 저 1980년 5월 이래, 다져지고 또 다져온 생각이다. 보라, 우리의 이웃을. 상대적으로 가난해져가는건 우리 고장의 삶만이 아니다. 사람도 가난해져간다. 사람가난의 인식은 물론 후생들을 가볍게 보아서가 아니다. 도저히 기대할 수 없다는 뜻에서도 아니다.

일찍이 광주가 제기했던 민주, 민중, 민족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 고장의 재목들이 남의 고장의 몇 갑절 이상으로 자라나야만 한다. 언제나 말해온 대로 광주의 보상과 진상규명은 해결의 단초에 지나지 않는다. 절대로 해결의 완성일 수는 없는 것이다. 민주, 민중, 민족의 모순이 풀어져야만 해결의 새날이 밝아온다. 그 새날에의 장정이야말로 우리의 광주가 한국현대사의 원점으로 지목되는 근거가 된다.

그러나 그 새날은 거저 밝아오는 것인가. 아니다. 결단코 아니다. 장정의 일꾼들만이 열어낼 수 있는 역사의 이정표이다.

일꾼은 사람이다. 때문에 나는 우리 고장의 재목이, 사람이, 그렇게도 고픈 것이다. 사람가난의 상대적 빈곤감이라고나 할까. 그 간절한 소망을 거듭 확인코자하는 충동은 감히 몇해 전에 썼던 나의 문장을 ‘자기표절’하는 어리석음까지를 자행케 한다.

“…그러나 고향이여,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의 땅이여. 우리의 형제자매와 아들, 딸, 손주들의 땅이여. 그리고 민주, 민중, 민족의 함성으로 세계의 지도 위에 보통명사로 빛나는 도시여. 이제 넘치는 그 의로움으로, 의로움과 외로움의 등식을 파괴할 수는 없는가. 의로우면서 또한 외롭지 않은 성시(成市)의 지평을 열 수는 없는가. 상접(相接)한 피골(皮骨)의 빛줄기에 풍요의 육신을 붙여 갈 수는 없는가. 살찐 소크라테스가 될 수는 없는가. 광야의 외침을 누리에 전파하는 바람의 동력, 그 원천의 힘을 우리의 것으로 가꾸어 낼 수는 없는가. 아, 그러나 저 5월의 공화국을 먼 산으로만 지켜본 무리는 우리의 고향 앞에 열 수 있는 입이 없다. 오로지 깊은 경배의 삶으로 더 많은 아들, 딸과 손주들을 낳고 우리의 인구와 인력을 키워가는 무지한 작정부터를 밀어나갈 뿐이다. 그 인구와 인력이 뚝을 넘어서는 날, 권력과 독점자본과 저 휴전선의 장벽도 마침내 무너지리라. 그러나 다시 우리의 고향이여. 피맺힌 절규의 음조속에 빛나는 무실(務實)의 선율을 쌓아 갈 수는 없는가. 타오르는 우리의 가슴만큼, 우리의 머리를 키워갈 수는 없는가.…”

-오늘은 어제의 내일-
천재시인 보들레에르도 어떤 성경구절을 한 대목 바로 깨닫는데 몇 십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고백했던 일을 기억한다. 관념이 한 인간의 삶이 되고 피가 되어 생동하기에는 그만한 세월과 추구가 요구된다. 고은시인이 만해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털어놓았던 것처럼 어른은 흔히 코딱지를 떼어달라고 뻗은 어린 아이의 손가락을 저 멀리 달을 가리키는 것으로 착각한다. 관념과 현실, 그리고 관념과 육화를 거친 체질의 거리는 그만큼이나 멀다.

올해 노벨문학상을 탄 나딘 고디머 여사도 일찍이 그 비슷한 얘기를 토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루라니, 어느 하루의 일?’이라는 그의 에세이는 이렇게 시작된다.

“나의 하루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루, 곧 지금 현재라는 것. 좋든 궂든 내일의 자기를 생각하지 않고 오늘 하루를 산다는 것, 그걸 깨닫는데 나는 일생이 걸렸다. 기대이든 두려움이든 이미 내일을 살고 있다면 오늘이라는 날은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작가라는 존재는 언제나 어제를 의식하지 않으면 안된다. 기억이라고 하는, 남의 말을 몇 번씩이고 되풀이 반향시키는 창고가 없으면 작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 평생을 바쳐 깨달은 대작가에겐 매우 송구한 일이지만, 나는 그의 깨달음에 섣불리 동조할 수가 없다. 한마디로 말해서 나는 오늘을 어제의 내일로 생각한다. 그리고 오늘을 내일의 어제로 생각한다. 그와 나의 시간관은 맞부딪히는 셈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제를 반향하고 오늘의 창고를 지녔다는 그에게 경배를 올리고 싶은 심정은, 순전히 오늘 이땅의 가진자들, 권력과 자본의 아성은 ‘과거를 묻지 말자’고 허두를 뗀다. 그리고는 마침내 광주의 과거, 5월의 역사를 거론하는 이들에게 ‘반역’의 허울마저 내려 씌우려 덤빈다. 그들이야말로 역사를 학살하는 폭도인 셈이다. 그러고도 그들은 부끄러움을 모른다.

이 반동의 증후군은 그러나 저절로 꺼져가버릴 것인가. 아니다. 반동을 되돌이킬 반정의 역사는 일꾼을 요구한다. 재목을 요구한다. 그 일꾼과 재목들의 장정을 요구한다.

-기라성의 모임들이여 나서라-
5월의 광주, 그 맞은 켠에 버티어선 무리에겐 우리의 울부짖음이 공허하다. 우리의 울부짖음이 10년, 아니 20년만에 한번씩이나마 울린다면 그나마 다행일 터이다. 역사의 반정은 어김없는 우리의 몫이다. 그 멀고도 험난한 역사의 한길을 위해서 우리는 내일을 예비해야 한다. 그 예비는 당연히 재목, 일꾼으로 일컬어온 사람의 예비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기라성같은 이름의 사회단체와 모임들, 유수한 학교의 동창회들도 이제는 우리의 고향에 내려진 역사의 소명 앞에 옷깃을 여며야 한다. 우리의 고장에 닻을 내린 언론매체들도 그 연결고리로서 구실을 다해나가야 한다. 나는 오늘 출범하는 광주매일부터가 그 소임에 앞장 서 주기를 기대코자 한다.

빈말로만 우리의 무등이 명산이기를 고집하지는 말자. 허사로만 우리의 무등이 영원한 명산이기를 기구하지는 말자. 무등이 그의 품안에 명인을 길러 역사와 함께 영원히 사는 명인으로 가꾸어 나가자. 이미 먼 산을 쳐다보며 고함만을 지를 때는 아니다.

봉우리가 높다 해서 명산이 아니다. 그 아래 명인이 살아야만 명산이 된다. 물이 깊다해서 거저 신령한 건 아니다. 그 깊은 곳에 용이 살아야만 신령한 물이 된다. 그게 어찌 천여년 전 당나라 유우석의 깨우침일 뿐이겠는가.

진정 무등을 명산으로 사랑하거든, 명인을 키우라. 진정 무등이 영원한 역사의 명산이기를 기구하거든, 또 다시 명인을 키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