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마당] 생존의 법칙 / 수필 - 문선경

2021년 06월 21일(월) 19:02

유례없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여름이었다.

이른 새벽 운동을 나섰다가 저만치 보도블록 위에 누군가 버리고 간 듯한, 구겨진 노란 작은 색종이 같은 물체 하나가 어슴푸레하게 눈에 띄었다. 무심히 몇 발자국을 더 다가가서야 그것이 다름 아닌 보도블록 틈새에 자리한, 이슬을 머금은 채 이제 갓 피어난 한 송이의 노란 채송화임을 알게 되었다. 구겨진 색종이 정도로 생각했던 물체가 간밤 이슬을 머금고 이제 갓 피어난 채송화임을 알고는 나도 모르게 짧은 탄식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무심히 지나다니는 곳, 흙이라고는 쉽게 눈에 띄지도 않는 척박한 보도블록 그 사이에 어떻게 뿌리를 내리게 되었을까? 날마다 머리 위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발자국은 얼마나 위태위태하였을까? 어쩌면 몇 번, 발길에 차이고 밟힘을 견뎌내었기에 그토록 더 환한 꽃을 피운 것인가? 자동차 소음과 매연은 어떠했으며, 비 한 방울 흩뿌리지 않았던 그 무더웠던 시간들은 또 어떻게 견뎌냈을까? 누군가 애써 가꾼 것도, 심은 것도, 애지중지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이렇게 환한 꽃을 피울 수 있었다니. 마치 불우한 역경을 혼자서 꿋꿋하게 견디어내고 마침내 훌륭하게 훌쩍 장성한 한 청년을 마주했을 때 느껴지는 경외심과 연민이 함께 일었다.

얼마 전에도 뜻밖의 장소에서 나무의 강렬한 생존본능에 경건함을 느낀 적이 있었다.

고창읍성의 맹종죽림 (孟宗竹林)의 맹종죽 사이로 얽힌 듯 자리한 소나무 몇 그루가 바로 그것이다. 고창읍성 간다는 말에 “고창읍성에 가거든 대나무 숲에 함께 자라는 소나무를 보고 오라”던 어떤 분의 당부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공생의 법칙’에 대한 해설사의 해설 때문이었는지, 시간이 지나고도 맹종죽림의 소나무들이 강한 여운으로 남았다. 위를 향해 일직선으로만 자라는 대나무들 사이에서, 옆으로 가지를 뻗으며 자라야 하는 소나무가 어떤 방식으로 서로 공생할 수 있었을까? 해설사의 설명으로는 대나무 숲에 자라는 소나무는 옆으로 곁가지를 내지 않고 대나무를 따라 몸을 곧추세우며 자란다고 했다. 소나무가 대나무들 사이에서, 자랑하듯 곁가지를 드리우면, 결국 그 소나무는 고사 되고 만다는 것이었다. 생각해본즉, 나무와 나무 사이의 간격이 좁고 일직선으로 자라는 특성을 지닌 대나무 숲에서 소나무가 넓게 곁가지를 뻗으면 곁가지가 결국 주변의 대나무를 밀어내게 되었을 것이다. 밀려나 중심을 잃은 대나무가 점점 기울어 넘어지면 넘어지는 굵은 대나무의 무게를 소나무가 감당하지 못해 결국 소나무도 고사 된다는 의미였을까?

대나무 숲에서 소나무의 공생 전략은 상대를 해하지 않고 나를 지키는 방법을 모색했을 것이다.

살아있는 것 중 신비롭지 않은 것은 없다. 움직이지 못하니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는 나무나 풀도 예외가 아니다. 보도블록 사이의 척박함을 이긴 채송화나 맹종죽림 (孟宗竹林)의 소나무에 감흥이 남다른 것은 그것들의 생존 법칙이 사람 사는 이치와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조직이라는 문화에 뿌리내리고 살아야 하는 우리의 생존방식과도 일맥상통하다. 까닭에, 상대를 보호하는 것으로 나를 지키는 생존전략을 가진 소나무나, 자리를 탓하지 않고 묵묵히 환한 꽃을 피워내었던 그 보도블록 틈새의 채송화는 지난한 겨울과 다시 봄을 보내고도 여전히 생경한 감흥으로 남아있다.

<문선경 약력>
▲2014 대한문학 등단
▲광주 문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