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가 무슨 죄? / 천세진 |
| 2021년 07월 25일(일) 19: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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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에서의 사건 이후, 문 대통령은 공군참모총장 보직신고를 받는 자리에서 “병영문화 혁신”을 요구했고, 다른 자리에서는 “부실급식과 억울한 죽음 낳은 병영문화 폐습”을 바로잡겠다고 했다. 법무부에서는 검찰의 부적절한 “수사 관행”을 개선하겠다고 했다.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이지만 ‘문화, 폐습, 관행’을 혁신하고 개선한다는 말에 절망했다. 대통령, 여야 정치권, 군, 공무원 조직 등 구세대 전체가 심각한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범죄가 발생했을 때 가장 흔히 듣는 변명이 “위법이기는 하지만 관행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위법은 위법일 뿐이다. 그 얘기는 법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이고, 만들어졌다 해도 원칙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작동하게끔 하는 시행 장치가 부실하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줄 뿐이다. 범죄를 관행과 폐습으로 돌리면 안 된다. 오로지 법을 지켰느냐, 법을 지키지 않았느냐가 판단의 기준이어야 한다.
문화나 관행을 거론하는 순간 법정신은 사라진다.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 또한 사라지고, 갑자기 가해자나 범인이 특정인이 아니라 관행과 문화가 되고 만다. 관행과 문화는 몸을 갖고 있지 않다. 사람의 머릿속에 존재한다고 가정할 뿐이지 실체가 없다. 가시적 실체를 얼마든지 부정할 수 있는 관행과 문화를 법인으로 지목하는 것은 시대변화에 둔감한 수사(修辭)다.
범법자들이 술과 관행, 폐습 때문이라고 주장하면, 술과 관행을 구속할 것인가? 똑같이 술을 마시고, 관행의 실체를 아는 사람들 중에도 음주운전을 거부하고, 폐습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이 문제이지 술과 관행, 문화는 아무 잘못이 없다. 범죄 자체가 아닌 다른 이야기를 하는 순간 본질은 사라진다. 사건을 일으킨 주체와 문제의 핵심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범죄를 가리려고 쓰고 있는 마스크를 걷어내야 하는 판에‘병영문화’ 같은 마스크를 씌우면 안 된다.
클라우디오 마그리스는 ‘다뉴브’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법에 대항하여 사랑에 호소하는 것은 사랑에 대한 모독이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자유와 사랑 그 자체를 빼앗기 위한 도구로 사랑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범죄를 단죄하는 자리에는 사랑 아니라 어떤 것도 들어서서는 안 된다. 범인의 자리에 문화가 앉아 있는 것처럼 말해서는 안 된다. 범죄가 문화가 되는 순간은 우리 모두가 악인이 되는 순간이다.
지금 부족한 것은 더욱 촘촘하고 엄중한 처벌이다. 범죄사실의 보고를 지연하고 은폐하는 행위에 대한 세밀하고 무거운 형벌이 마련되어야 한다. 보이스피싱, 금융사기, 음주운전 살인 등이 계속되는 것도 축출 의지 부족과 낮은 형량 때문이다. 잘못된 것이 있다면 관행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법을 강화하고 제정하면 된다.
‘다뉴브’에는 이런 글도 있다. “파렴치한에게는 늘 공모세력이 있다. 미국인들은 멩겔레를 감옥에서 풀어주었으며, 영국인들은 그가 도망가도록 도왔고, 수도사들은 그를 숨겨주었으며, 파라과이 독재자는 그를 보호해주었다. 분명 나치즘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야만행위는 아니다” 야만적인 사회는 범죄자를 풀어주고, 도피시키고 보호해주는 공모가 존재한다. 공모 방식은 직접적인 방식일 수도 있고, 문화나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넘어가려는 간접적인 방식일 수도 있다. 두 방식 모두 파렴치하지만, 간접적인 방식이 더 나쁘다. 직접적인 방식은 나중에라도 처벌이 가능하지만, 간접적인 방식은 사회 구성원 모두를 공모자로 만들기 때문이다.
얼마 전, 여당 대표는 선거 패배와 지지율 하락에 대해 “무능한 개혁과 내로남불 때문이었다”며 반성하자고 했다. 반성은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 21대 국회가 열린지도 1년이 훨씬 넘었다. 설령 지난 정부가 더 부도덕하고 부패했더라도 시간은 기억을 침식한다. 침식이 일어나기 전에 문화와 관행의 자리에 법을 세워야 한다. 그게 180석 가까운 의석을 준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