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로 읽는 전라도 역사기행](2)조선의 BTS 이날치와 국창 김창환②

‘어전광대’ 김창환, 우리나라 창극을 개척하다
고종 총애, 원각사 실질적인 운영 ‘당대 최고 명창’ 인정 받아
고향에 은거…조카 임방울 1925년 전국명창대회 데뷔시켜

2021년 08월 19일(목) 19:30
2015년 8월21일 광주시가 주최하고 (사)임방울국악진흥회, 광주매일신문이 주관한 ‘국창 김창환의 소리세계’ 학술 세미나. <광주매일신문 자료사진>
명창 임방울(林芳蔚, 1904-1961)의 외삼촌인 김창환(金昌煥)은 사촌 형 이날치(李捺致, 1820-1892)와 함평 출신 정창업(丁昌業, 1847-1919)에게 판소리를 배웠다. 흥선대원군 앞에서 소리를 한 정창업은 윤현궁의 마지막 가객이었다.

명창 정창업에게 본격적인 소리를 배운 김창환은 발림 능력이 뛰어났다. 발림은 연극적 동작으로 몸짓, 표정, 부채 등으로 극적인 상황을 실감나게 표현하는 동작이다.

서울까지 김창환의 유명세가 알려졌고, 조선의 마지막 왕이었던 고종이 그를 궁궐로 자주 불러들였다.

왕 앞에서 소리 한 날이 많아지면서 그를 ‘어전 광대’로 불렀다. 명예직이었지만 고종은 김창환에게 의관까지 제수했다.

어느날, 고종이 김창환의 소리에 반해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냐?”

“상감마마의 용안을 그려주시면 평생 모시겠나이다.”

광산구 삼도동에 건립된 김창환 기념비.
고종의 초상화를 받은 그는 고종의 진영(眞影)을 모시는 사당을 차리게 됐고, 고종이 잡았던 손목에 황금 토시를 만들어 끼고 다녔다.

고종 41년,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해 서양식 극장인 원각사가 세워졌고, 김창환은 전국 명창을 모아 원각사에서 공연을 했다.

이를 계기로 원각사를 거점으로 김창환과 송만갑(宋萬甲, 1865-1939), 이동백(李東伯, 1867-1950) 등이 판소리 창극화를 완성하게 된다.

창극은 소리꾼들이 배역을 맡아 창(唱)을 중심으로 극을 전개하면서 노래와 연기를 했다.

연극과 뮤지컬의 시초가 된 것이다.

김창환은 원각사의 실질적인 운영자가 됐고, 판소리와 창극을 대중화했다. 국악공연단체였던 협률사(協律社)를 조직한 그는 원각사에서 상설 공연을 했다. 협률사의 운영은 궁내부(宮內府, 왕실에 관한 업무를 총괄한 관청)에서 직접 관장했다.

원각사의 첫 창극 공연은 ‘춘향전’이었고, 입장료는 지금의 10배 이상 비쌌지만 2천석이 매진됐다. 춘향전이 대성공을 거두자 당시 시대상을 반영한 ‘최병두 타령’을 창극화했다.

‘최병두 타령’의 줄거리는 탐관오리가 부임해 고을의 부자인 최병두를 잡아다가 곤장을 치는 내용이다.

최병두를 죽이고 모든 재산을 탐관오리가 몰수한 실화를 바탕으로 재현했다. 김창환이 최병두 역을 맡아 곤장을 맡고 숨지자 관객들이 김창환의 목에 엽전 꾸러미를 걸어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러나 1910년, 일제는 협률사 공연이 민족혼을 고취한다는 핑계로 협률사를 해체한다.

지방공연을 하던 중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김창환은 서울로 올라가지 않고 고향인 나주군 삼도면(현재 광산구 삼도동) 양화리로 들어가 은거했다. 이후 고종이 숨지자 그는 동네 뒷산에 사당을 지어 고종의 영정을 모셔놓고 날마다 제를 지냈다.

임방울이 소리를 배우기 위해 김창환을 찾아왔을 때도 먼저 고종의 사당에 가서 참배하도록 했다.

이때 그는 일흔이 넘은 고령이어서 임방울을 가르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어디 한번 불러보거라”

외숙 앞에서 한 소절을 불렀으나 창피만 당했다.

“그래서 무슨 소리를 한다고. 쯧쯧….”

이후 임방울은 생전에 외숙 앞에서 소리를 했던 기억을 되살리며 웃으면서 농담 비슷하게 말하곤 하였다.

“조카를 내팽개쳐 버리던데요. 하하”

고향으로 내려온 그는 조카 임방울을 1925년 전국명창대회에 데뷔시켰고, 이때 임방울이 부른 소리가 그 유명한 ‘쑥대머리’다. 그는 평상시에 통영갓에 백마를 타고 나주 시내를 누비곤 했다.

일본 경찰서장이 부임한 첫날, 백마를 타고 풍채 좋은 사내가 지나가자 신임서장이 직감적으로 고을의 지체 높은 양반으로 오인하고 거수경례를 했다. 그리고 수행하던 한인 순사에게 물었다.

“저분이 누구시냐?.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야겠다.”

“하하. 저 사람은 광대입니다. 노래하는 가객으로 조선의 명창입니다.”

그 말에 신임 일본 서장은 어이가 없는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고 한다.

신광재·역사문화 전문기자
그는 아무나 함부로 제자로 두지 않아서 현재 몇 장의 음반만 남아있다.

김창환은 이날치 이후 서편제의 독보적인 명창이었으며, 뛰어난 작곡가였다. 그리고 소리뿐 아니라 연기에 뛰어난 예능인이었다.

원각사의 실질적인 운영자였던 그는 우리나라 창극 개척 활동에 큰 업적을 남겼다.

광산구 삼도동에 옛 집터는 남아있지만, 그의 묘는 파헤쳐진 채 잡초만 무성하다.

직업훈련원과 자동차 학원이 들어서면서 이장공고를 냈으나 누구도 연락이 없었다. 무연고 묘로 처리돼 공동묘지에 옮겨지는 신세가 됐다.

생전에 고종의 총애를 받으며 국창으로 살았으나 사후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국창 김창환의 판소리]
판소리 5명창(LP판) 가운데 중앙에 소개된 김창환.

김창환의 소리는 처음 들으면 동편제 같은 느낌을 준다.

김창환은 성음이 우람하고 호방하며, 가풍이 엄정하고 늠름해 계면조 선율을 마치 우조 악상처럼 부르기 때문에 청승맞은 느낌이 전혀 없고, 대신 거대한 스케일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교하고 미묘하게 선율을 운용하면서 장식을 다는 것은 그의 소리가 왜 서편제인가를 알게 한다.

그렇지만 김창환의 제자로 알려진 오수암이나 정광수에 이르면 호방하고 엄정한 기운을 줄어드는 대신 구성지고 애처롭고 정교하고 화려한 맛을 점점 더해간다.

김창환의 판소리는 후에 김창환-김봉학, 김창환-박지흥, 김창환-박성환으로 계승됐고 그후 김봉학의 소리는 오수암 정광수로, 박지흥 소리는 박동진으로 , 백성환의 소리는 백남희로 이어졌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이 기사는 광주매일신문 홈페이지(www.kjdaily.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

URL : http://www.www.kjdaily.com/1629369032554103222
프린트 시간 : 2023년 04월 02일 07:4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