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칭의 사회적 기호 / 김선기

2021년 08월 23일(월) 19:15

김선기 문학평론가 / 강진군 시문학파기념관장

얼마 전, 핸드폰 가게에 들를 일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사장님! 어서 오세요”라며 젊은 친구가 상냥하게 인사를 건넸다. 사장님이라…. 듣는 이에 따라서 말의 뉘앙스가 다르겠지만, 지금껏 살면서 ‘사장’이란 명함을 한 번도 가져본 적 없거니와 앞으로도 그럴 개연성이 일도 없는 나로선 멋쩍은 인사였다. 센스있는 직원은 얼른 내 표정을 읽고 “아버님! 뭘 도와드릴까요?”라며 더욱 공손함을 보였다. 이건 또 웬 시추에이션인가, 저렇게 싹싹한 아들을 둔 적 없는 나에게 아버님이라니….

물론, 핸드폰 가게 직원이 건넨 언어적 함의를 모르는 바 아니다. 가게를 찾은 손님에 대한 예우와 친절함의 표현으로 ‘사장님’과 ‘아버님’이란 호칭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또 여기에 요즘 남성들에게 보통명사처럼 붙는 ‘사장님’이란 사회적 기호도 작용했으리라. 이제 ‘사장님’의 호칭은 자영업 전성시대에 어울리는 우리 사회의 아이콘이 된 것 같다. 아무튼 그날 젊은 친구의 과분한 호의에도 불구하고, 왠지 어색하고 거북스러웠던 게 사실이다.

호칭어는 화자가 대화 상대방을 부를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국어는 대화 상대에 대한 대우 정도를 문법 장치로 정교하게 표현하는 언어인 만큼 상대에 대한 호칭어 역시 다양한 방식의 유형이 존재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말에 대한 속담과 격언이 많다. 그만큼 우리가 말하는 언어는 인간관계에서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한 수단임을 알려주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하는 첫 번째 연결고리는 상대방을 부르는 호칭으로부터 시작한다. 호칭은 상대방에 대한 예의와 서로의 존재적 가치를 암묵적으로 규정한다. 개인의 고유한 개성이나 특성, 전문성, 역할, 책임, 성과 같은 것들의 가치가 호칭에 내재 되어 있다는 얘기다.

우리는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 음식점에서, 학교에서, 자신이 근무하는 직장 등 여러 장소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과 더불어 살면서 다양한 호칭을 사용한다. 적절한 호칭어는 상대에게 좋은 느낌을 주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상호 간 불편함을 초래할 수 있다. 이것은 사람보다 직위를 중요하게 여기는 우리의 수직적 정서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흔히 이름보다 직함을 넣어서 불러주는 게 보편화됐고, 또 그게 예의라고 여긴다. 물론 같은 공동체 안에서야 당연한 일이지만 한 번 국장은 퇴사해도 국장이요, 사장 아닌 사장님은 주변에 널려있다.

한국 사회에서 호칭을 적절히 구사하는 일은 여간 어렵다. 서로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라 말문을 트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흔히 쓰이는 호칭은 대개 가족 관계나 직업 또는 직급을 나타내는 명칭들이다. 형님, 언니, 이모, 아저씨, 아주머니, 사장님, 부장님…. ‘아주머니’보다 격을 높인 ‘여사님’이나 ‘사모님’은 사장님만큼 보편적으로 쓰이진 않는다. ‘사모님’은 원래 스승의 부인을 높여 부르는 호칭인 만큼 격에 안 맞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우린 아무 생각 없이 쓰고 있다.

사회 민주화와 더불어 호칭 문화도 바뀌고 있다. 대통령을 ‘각하’라고 부르던 시절은 일찍이 끝나고 이제는 각하 호칭이 희화화되기에 이르렀다. 판검사를 일컫는 ‘영감님’도 사라지는 중이다. 하지만 우리 문화 속에 배어 있는 서열 의식은 스스로 의식하지 못할 만큼 깊다. 나이가 곧 권력이 되는 문화는 거의 한국인들 무의식에 자리 잡고 있다. 여기에는 존댓말 못지않게 호칭어도 한몫한다.

호칭은 사람 사이의 관계를 일러준다. 호칭만 들어도 누가 손위이고 누가 아래인지 알 수 있다. 서열을 세울 수 없는 관계라 하더라도 굳이 자신을 낮추는 모습에서 겸손이라는 미덕을 보이곤 한다. 한 번도 함께 일한 적 없는 사람에게 자진해서 사원이 되어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겸손은 호칭이나 말로 남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닐까 싶다. 센스없는 사람은 세상살이도 팍팍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