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행한 관객들 / 천세진 |
| 2021년 08월 29일(일) 19:44 |
|
정치판을 볼 때마다 ‘석양의 무법자’가 떠오른다. 현재의 정치판을 영화로 가정하고 ‘석양의 무법자’의 원제목을 패러디해서 제목을 짓는다면 어떤 것이 나올까? ‘The Bad, The Stupid and The Weak’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한국어로 바꾸면 ‘나쁜 놈, 멍청한 놈, 힘없는 놈’이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의 주요 정당들을 어느 한 자리에 고정해서 넣기가 아주 어렵다는 것이다. 각각의 성격을 어찌나 그렇게 모두 함께 갖고 있는지 탄식이 나올 정도다.
나쁜 정치는 국민들을 사람이 아닌 다른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요즘 느끼는 것은 숫자가 된 사람이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숫자가 된 사람을 먼저 만난다. 전날 코로나 환자가 몇 명 발생했고, 백신을 맞은 이가 몇 명이고, 백신을 맞고 죽은 이가 몇 명이고, 죽기는 했지만 인과성을 가진 이는 없고……,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 이후 줄곧 그랬다. 숫자를 챙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지만, 현 정부의 시야는 지나치게 숫자에 매몰되어 있다. 장기적으로 엄청난 문제를 가져올 순인구 감소 문제조차 코로나 숫자에 묻히고 말았다.
백신을 맞고 갑자기 죽은 분들에 대한 현 정부의 접근방식도 숫자만 보인다. 현상을 숫자로만 이해하려는 경우, 국민 개개인은 오롯한 존엄성과 가족관계 속에서의 대체 불가능한 소중함을 잃고 만다. 누군가 사망했을 때 그 가족은 심리적 충격은 물론이고, 경제적으로도 나락으로 떨어진다. 코비드 국면 초기에 정부는 코로나 백신을 맞고 사망한 이들을 지원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집요하게 인과성을 따지고 있고, 인정을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의학적 지식은 아직도 미지의 부분이 너무 많다. 백신은 더더욱 그렇다. 바이러스와 백신이 일으키는 이상 증세들에 대한 온전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음에도 인과성이 없다는 판정을 내리는 자체가 모순이다. 불완전한 의학적 지식에 기대어 갑작스럽게 비극을 맞은 국민들을 외면하고 있는데, 인과성 여부가 국민을 지키는 일보다 더 중요할까?
돈이 아까운 것일까? 돈이 없는 것이 아니다. 고작 1인당 25만원을 지원하려고 당정, 여야가 다툼을 벌였다. 공무원들과 정부투자기관, 대기업 직원들에게는 없어도 되는 돈이다. 80%니 88%니를 따지며 싸울 것이 아니라, 그 돈으로 백신을 맞고 사망한 분들의 유족에게 몇 억 원씩이라도 지원을 하는 것이 옳다. 그게 국민을 지키겠다는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사람을 숫자로만 이해한 결과가 더는 아이들을 낳지 않고, 헬조선이라며 나라를 떠나고 싶어 하는 세상이다. 숫자를 버릴 수는 없지만, 숫자가 가리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지금이 더욱 그런 모습을 보여야 할 때다.
그런 상황인데도 현실 영화판에는 지혜롭고 능력 있는 The Good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다음 대권을 두고 벌이는 전쟁 영화가 한창 상영 중인데, 죽어가는 국민들을 챙기는 후보들은 보이지 않고, The Bad와 The Stupid만 가득하다. 국민들은 영화관에 앉아있는 관객이기도 하지만, 불행하게도 동시에 영화 출연자들이기도 하다. 관객, 출연자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제작자이기도 하다. 2016년에는 영화감독을 끌어내린 적도 있다.
우리는 앞으로도 극장에 앉아서 고통스러운 현실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게 될 것이고, 동시에 어김없이 다큐멘터리에 출연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슬프다. “각 나라는 자신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는 것이 여러 나라가 되풀이하여 보여준 틀림없는 지혜임을 확인해주었다”는 주세 사라마구의 ‘죽음의 중지’ 속 문장이 이상하게도 자꾸 떠오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