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랑생가에서 부치는 가을 엽서 / 김선기 |
| 2021년 09월 27일(월) 19: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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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지난여름의 신록은 한 페이지의 추억이 되었습니다. 청마 유치환이 정운 이영도에게 품었던 애틋한 연정처럼, 그리운 이에게 향기 나는 편지를 쓰고 싶은 계절입니다. 그래요,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는 건 가슴 설레는 일이지요. 그것은 의식의 살아있음이요, 아직도 청춘의 맥박이 뛰고 있다는 증표입니다. 지나온 시간, 참으로 힘듦이 많았습니다. 도종환의 노래처럼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며, 아픔 없는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런 말이 있잖아요. 인생은 고행의 바다라고.
올가을은 김영랑이 살았던 강진 탑골 마을 대숲에서 시작된 듯합니다. 간밤에 대숲에서 울어예는 귀뚜라미 소리에 그만 잠을 설쳤지 뭡니까. 그 친구들의 울음이 잦아들면 머잖아 또 서리가 내리겠지요. 그러면 철새들은 모두 고향 찾아 훌훌 날아갈 테고, 남아있는 우린 헐벗은 나뭇가지를 휘감은 바람 줄기를 움켜쥐고 하냥 섭섭한 맘으로 밤을 지새우겠지요. 그 때문에 많은 사람이 가을을 이별의 계절이라고 말하나 봅니다. 어찌 보면 만남과 헤어짐은 모든 생명체의 숙명 아니겠습니까. 그 오묘한 자연의 진리를 뇌이며 위안 삼을 일입니다.
요즘, 영랑생가 대숲에 부는 바람과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채찍으로 변주되어 귓전을 파고듭니다. 당신은 지난봄 무슨 씨앗을 뿌렸는가, 또 지난여름 얼마나 땀을 흘렸는가. 글쎄요, 얼른 입술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댓잎이 사각일 때마다 자연의 매서운 회초리가 폐부를 에이는 이유입니다.
영랑이 살았던 강진의 가을 풍경은 참으로 곱고 예쁩니다. 영랑과 용아 지용 수주 현구 석정 등 시문학파 시인의 시혼이 서려 있는 시문학파기념관에서 송출하는 감미로운 클래식 선율과 황금물결 넘실대는 작천 들녘, 바다이면서 호반을 연상케 하는 강진만과 거기에 광활한 갈대밭까지 어우러진 강진의 정경은 마치 한 폭의 수채화 같지요.
그뿐이겠어요. 발길 닿는 곳마다 인정 넘치는 순박한 사람들과 시골 아낙의 손맛이 밴 맛깔스러운 토속 음식, 그리고 임영웅의 ‘마량에 가고 싶다’ 열창 덕에 핫 플레이스 된 마량항, 여기에 만덕산 기슭에 고즈넉이 자리한 백련사의 저녁 예불 소리는 청아하기 그지없어 무릉도원이 따로 없지요.
우리의 삶에도 하프 타임이 필요합니다. 잠시 일상에서 벗어나 강진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맡겨보면 어떨까요. 지난여름 헝클어진 마음의 매듭을 훌훌 풀고 싶거든 시의 정원이 가꿔진 강진을 추천합니다. 그곳은 아주 소박하면서도 품격 있는 인구 3만 5천의 작은 도시입니다. 아름다운 모국어를 가꾸던 ‘언어의 정원사’ 영랑의 숨결이 아직도 살아있는 곳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강진사람들은 영랑의 후예답게 저마다의 가슴에 모란 한 송이씩 키우고 있는 듯합니다. 그만큼 성정이 착하다는 얘기겠지요. 시의 본질, 즉 문학의 지향점은 무엇이겠습니까. 상상의 세계를 통하여 현실 극복의 환희를 구현하는 게 바로 문학의 본질이 아니겠어요. 그렇습니다. 문학은 삶에 지치고 고달픈 우리에게 큰 위안과 구원이 되고 있지요. 특히 코로나 19 상황에서 말입니다.
지금, 시의 향기 그윽한 영랑생가엔 붉다 못해 검붉은 맨드라미 몇 그루가 알 수 없는 향을 뿜으며 그댈 기다리고 있다지요. 그곳에 가면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이 같은 국화며, 소쩍새 울음소리도 덤으로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라던, 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답다던, 낙엽이 흩어진 날 헤매는 여자가 아름답다던 고은의 시를 읊조리며 이제 마침표를 찍어야겠습니다.
가을을 동경하는 그리운 이여, 이만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