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작업실]유년시절 동심 그리는 ‘구름천사’ 노의웅 화백 ‘창작이란 끝없는 변화와 도전’ 화업 외길인생 영원한 화두 ‘기억과 치유의 공간’ 고향은 삶의 원동력이자 그림의 본향 한가족·부부展 등 다양한 색채 하모니…행복한 ‘예술 가족’ ‘구름천사’ 주제…내년초 서울 인사아트프라자 갤러리서 초대전 “예술로 세상 못 바꿔도 순수함으로 희망 말하고 싶어” 최명진 기자

2021년 11월 02일(화) 19:05

내가 처음 그린 그림은/도화지도 없고/크레용도 없고/연필도 필요 없는/파란 하늘이었다
송이송이 구름이 작은 동물과 같고/구름 천사와 고운 꽃들이 하늘에서 내려오고
내가 살아가면서/마음 깊이 담아두었던 귀한 것들을/하늘에서 배웠다
내가 처음 그린 그림은/풀밭에 누워 구름을 보고 만물의 형상을/그려 보았다/오직 사랑만이 있는 그림 학교였다

갤러리에 전시된 ‘금강산의 향연’이라는 작품을 설명하는 노의웅 화백. 3천호에 달하는 이 그림은 노 화백이 북한 금강산을 수 차례 방문해 200여장의 스케치를 해오는 등 2년 간의 부단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사진=최명진 기자

올해 일흔 아홉의 노의웅 화백이 어린 시절 구름을 보며 떠올린 동심 속 이야기를 담은 글귀다.

어릴 적부터 작은 미술관 하나 갖는 것이 소원이던 노 작가는 3년 전 광주 남구 수춘마을 양과동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미술관을 세웠다.

어릴 적부터 작은 미술관 하나 갖는 것이 소원이던 노 작가는 3년 전 광주 남구 수춘마을 양과동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미술관을 세웠다. 전시장에 걸려있는 작품들은 2개월마다 한 번씩 새로운 그림으로 교체된다. /사진=최명진 기자

포충사에서 차로 10분 정도 가다 보면 마을 끝자락에 자리잡은 미술관을 만날 수 있다. 오렌지색과 초록색, 파란색으로 칠해진 알록달록한 건물이 눈에 띄었다.

400평 남짓의 미술관에는 작가의 작업실, 수장고, 휴게공간 등이 함께 마련됐다.

수장고에는 소년시절부터 최근까지 그려낸 작품 약 3천500여점이 고스란히 보관돼 있다. 전시장에 걸려있는 작품들은 2개월마다 한 번씩 새로운 그림으로 교체된다.

전시실에 들어서니 산을 소재로 한 웅장한 작품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붉은 색 바위들이 빼곡히 솟아있는 ‘금강산의 향연’이라는 작품이다. 3천호에 달하는 이 그림은 작가가 북한 금강산을 수차례 방문해 200여장의 스케치를 해오는 등 2년 간의 부단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통일을 염원하며 그렸어요. 단순한 바위 같지만 남북한 사람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반가워하는 모습이에요.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기법으로 제 상상력을 덧붙였죠. 화면을 이상 세계의 일만이천봉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구름천사’ 시리즈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시시각각 변해가는 자연의 아름다운 모습이 그림 속에서 오롯이 전해지고, 화려한 오방색으로 수놓아진 강렬한 색채는 화려하기 그지없다. 그의 그림들은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자연의 본질인 생명성을 편히 드러낼 뿐이다.

노 작가가 그림을 시작한 때는 국민학교 입학 전. 크레용, 도화지 하나 찾아볼 수 없는 6·25전쟁 직후였다. 배가 고파 들이며 산이며 할 것 없이 찾아다니며 풀뿌리 캐먹던 시절, 작가에게 하늘은 도화지였다.

“옛날 하늘은 진짜로 맑았어요. 우리 어렸을 땐 공해 하나 없었으니까요. 둥글둥글 뭉게구름이 떠다니면 그걸 들판에 누워 한참을 쳐다봤습니다.”

어려서부터 기질은 있었던지라 그가 알고 있는 형상은 곧잘 그림으로 표현해냈다. 어렸을 적 친구인 순이, 영희, 집에서 기르던 강아지도 구름처럼 두둥실 하늘을 떠다녔다.

국민학교에 입학하자 반공 포스터는 항상 그의 몫이 됐다. 구호 물자로 받은 크레용과 도화지로 하루 2-3시간씩 그림을 그렸다.

고교 시절엔 미술부원이 노 작가 뿐이었다. 다행히 미술교사였던 고 김은수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체계적인 그림 공부를 할 수 있게 됐다.

그는 대학에선 서양화를 전공, 인물화 등 다양한 소재들을 그렸다. 이후 그는 서양화가로서 활동을 이어갔고,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하늘을 도화지 삼아 그림 그리던 소년은 어느덧 나이 여든을 바라보는 노년이 됐다.

흔한 소재인 풍경화부터 시작해 지금의 ‘구름천사’에 이르기까지 수십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의 화풍은 여러 번 바뀌었다.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한 그는 광주 지역의 목가적 자연풍물을 소재로 작업을 이어갔다. 자연 풍광 등 보여지는 것들을 중심으로 그림을 그려냈다.

“지금의 ‘구름천사’와는 전혀 다른 화풍이죠. 풍경화는 내가 제일 잘 그린다고 자부할 정도로 주구장창 그것만 그렸어요. 그러다 나만의 개성이 드러나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습니다. 나만 할 수 있는 것들을 끊임없이 연구했죠.”

오랜 시간 수많은 시행착오도 겪어야 했다.

“예술가에게 창작이란 끝없는 변화와 도전입니다. 화풍이란 건 온통 몰두를 하지 않으면 바꾸지 못해요. 전 세계 미술 작품들을 대상으로 내 그림과 비교하는 작업을 수없이 거쳤습니다. 조금만 비슷하면 바꾸고 또 바꾸며 지금의 ‘구름천사’에 이르렀죠. 한국적이고 동양적인 색채가 드러나는 그림이 됐습니다.”

그는 어느덧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원로작가의 일군에 들어섰지만, 하루 대부분을 여전히 그림 그리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교수직을 정년 퇴임한 이후로 하루에 10시간씩은 그림을 그려요. 새벽 3-4시께면 어김없이 일어나 점심 전까지 작업을 이어가는데, 주어진 하루가 얼마나 짧은지 모릅니다.”

작업 중인 노의웅 화백. 노 화백은 교수직을 정년 퇴임한 이후로 새벽 3-4시께 일어나 매일 10시간씩은 화업에 열정을 쏟고 있다. /사진=최명진 기자

노 작가는 다양한 시도를 많이 한 작가이기도 하다. 2002년 ‘나눔의 미학’이라는 주제로 전시회를 열어 유화 60여점을 관람객들에 나눠준 일화는 유명하다.

“청년작가 시절 돈이 없어 전시회를 열지 못하며 애태울 때 주위에서 참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누가 됐든 그림을 가져가면 그 신세를 갚는 것 아니겠어요. 화가로서 남을 위해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로 행복함을 느꼈죠.”

그는 사비를 모아 고교 시절 은사이자 자신에게 미술을 가르쳐준 고 김은수 선생의 유작전을 열기도 했다.

한가족 5인전, 6인전, 부부 기획전을 여는 등 가족 전시회를 통해 다양한 시선으로 풀어낸 작품들도 선보였다.

노 작가의 식구들은 ‘예술 가족’으로 잘 알려져 있다. 다섯 남매 중 세 딸이 서양화, 공예, 조각을 전공했고, 손녀 또한 미대에 진학해 예술가의 길을 함께 걷고 있다. 부인 임순임씨도 남편인 노 작가 어깨 너머로 그림을 배우기 시작해 서양화를 전공한 화가다.

“만나면 대화가 잘 통한다는 게 가장 감사한 일이죠. 다른 가정과는 달리 ‘미술’이라는 소재로 다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다는 점이 특별합니다.”

노 작가는 국립 현대미술관 초대전과 예술의전당 개관 초대전, 프랑스 르망 시청 초대전, 파리 중견작가 초대전 등 국내외 수많은 전시에 참여했다. 호남대 예술대학장을 역임했으며, 전국무등미술대전 운영위원장, 한국미술협회 고문을 맡고 있다. 일본 예술공론상과 오지호미술상 등을 수상했다.

수많은 작품과 전시들을 거쳤지만 그를 상징하는 단어는 여전히 ‘구름천사’다.

노의웅 作 '구름천사'<왼쪽>'와 '가족'

“제 기억 속 하늘은 언제나 아름다웠습니다. 그리고 그 속엔 천사가 살고 있을 것 같아요. 깨끗한 구름은 파란 하늘과 어우러져 저에게 언제나 희망을 주는 소재입니다.”

노 작가는 지금의 우산동인 서방에서 태어나 팔십 가까운 나이까지 줄곧 살아왔다. ‘구름천사’ 또한 어린시절 고향으로부터 느낀 영감에서 비롯됐다.

“제 고향 서방은 그 당시에는 광산군 서방면이었어요. 그곳에서 태어나 한평생을 지냈죠. 제 그림의 본향입니다. 산이 있고, 자연이 있고, 그 시절 하늘에 떠 있는 구름에서부터 제 그림은 시작됐어요.”

평생의 터전이었던 동네 서방은 재개발이라는 명분으로 현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그의 가슴 속에 여전히 남아있다.

“밤이면 밤마다 꿈 속에서 그리운 내 고향을 만납니다. 그곳에서 뛰놀다 잠에서 깨고는 해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서방, 날마다 그곳을 그리며 가슴으로 만나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구름천사’를 주제로 오랜만에 전시회를 갖는다.

이듬해 2월23일부터 3월1일까지 서울 인사아트프라자 갤러리에서 열리는 ‘구름천사’ 초대전이다.

노 작가는 이번 전시가 사람들에게 작은 위안과 치유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는 게 너무 막연하고 힘든 시대입니다. 옛 추억을 떠올리며 미소 짓게 되는 순수한 그림을 통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시간이 됐으면 해요.”

그에게 그림이란 ‘인생의 전부’다. 노 작가는 앞으로도 순수한 동심의 세계를 화폭에 계속해서 담아낼 생각이다.

“그림은 제 인생이자 삶 그 자체입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항상 천진난만한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그림엔 그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거든요. 끝까지 순수함을 잃지 않겠다는 것이 신조예요. 순박하고 따뜻한 감성을 그림에 녹여낼 수 있도록 힘 닿는 데까지 작업에 임하고 싶습니다.”

/최명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