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의 의암사(義巖祠)와 진주의 의기사(義妓祠) / 오수열
2021년 11월 07일(일) 19:21
오수열 조선대학교 명예교수 / 광주유학대학 학장
입동(立冬)을 앞둔 늦가을에 광주유학대학 학생들과 함께 전북 장수군(長水郡)의 주논개(朱論介) 관련 유적답사를 다녀왔다.

잘 알려진 것처럼 장수군은 제2차 진주성(晉州城)전투에서 순절한 주논개의 고향이다.

장수군이 고향인 주논개가 경남 진주성에서 순절한 까닭에 관해서는 전남 화순군(和順郡) 태생 의병장(義兵將) 최경회(崔慶會)와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가 없다.

최경회가 장수현감(長水縣監)으로 재임시 주논개가 그의 측실(側室)이 되어 부부(夫婦)의 연을 맺었고, 최경회가 진주성전투에서 순국하자 지아비의 원수를 갚기 위해 진주성으로 달려갔고 그곳에서 순절했기 때문이다.

문제의 발단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승리해 성(城)을 함락시킨 왜군들이 남강(南江)에서 승전을 축하하는 연회(宴會)를 개최했고, 주논개가 이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그녀의 신분을 기녀(妓女)로 위장한 데에서 비롯된다.

그녀가 의암(義巖)에서 주흥(酒興)에 취한 왜장(倭將) 게야무라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끌어안고 강물에 뛰어들어 순절함으로써 남편의 원한을 갚은 열녀(烈女)와 충절(忠節)의 모습을 함께 보인 사실이 진주성민(晉州城民)들에게 알려졌다. 여기까지의 상황 전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진짜 문제는 이후 진주 사람들이 그녀를 기리기 위해 사당(祠堂)을 세우면서 그녀가 당시 신분상 차별을 받던 측실이었던 사실과 기생의 복식(服飾)을 하고 주연(酒宴)에 참석한 것을 이유로 그 사당 이름을 ‘의로운 기녀를 모시는 사당’이라는 뜻의 의기사(義妓祠)라고 한데에서 비롯된다. 사실관계의 심각한 왜곡이 시작된 것이다.

그 후 그녀의 의롭고 자랑스러운 죽음이 그녀의 고향인 장수군에도 알려졌고, 마침내 1846년 장수현감(長水縣監) 정주석(鄭胄錫)이 그녀가 장수군에서 낳고 자랐다는 촉석의기논개생장향수명비(矗石義妓論介生長鄕竪名碑)를 세우면서도 그녀를 의기(義妓)라고 못 박아 놓았던 것이다. 봉건적 사고(思考)에서 벗어나지 못한 조선 관리들의 한계일 것이다.

이와 같은 역사(歷史)의 왜곡은 오랜 세월이 흐른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바로 잡아지고 있지 않으니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수년 전 진주성에 세워진 의기사(義妓祠)의 편액을 의부인사(義夫人祠)로 고치자는 주장을 경상도 지식인들에게 제안한 바 있는데 아직까지 진척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일은 주논개의 고향인 장수군에서 마저도 이처럼 왜곡된 역사가 버젓이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북 내륙에 위치한 장수군은 인구 2만여 명의 조용한 산중 고을임에도 주논개를 관광자원화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점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아름다운 호수를 포함해 상당한 규모로 조성된 ‘논개사당’의 곳곳에는 주논개의 행적을 새겨 놓았는데 하나 같이 ‘義巖祠’ 또는 ‘義巖朱論介’라고 되어 있다.

의암(義巖)은 진주 남강에 있는 바위로 주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투신한 곳이기는 하지만, 그 의암이 곧 주논개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사당이란 것은 원칙적으로 사람을 제사 지내는 곳이지 바위에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이치에 부합되지 않는 일이며, 역사적 사실로 보더라도 의암이 사당을 세워 제사를 받을 만큼의 공적이 있다고 할 수도 없지 않는가.

혹여 의암(義巖)이 주논개의 호(號)일 경우 의암사(義巖祠)라고 부르는 것도 가능할 수 있겠지만, 조선조(朝鮮朝)에서는 여성이란 이름(名)을 갖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고, 그저 ○○김씨라든가, ○○이씨 등으로 불리워졌던 것이다.

또 하나 주논개가 남강에서 순절한 후 상당 기간 그러한 사실이 민간에서 구전되어왔을 뿐, 어떠한 공식문서에도 등장하지 않았으며 단지 1620년 무렵 어우야담(於于野談)에 등장한 데에서 그녀에게 의암이라는 ‘호’를 사용한다는 것도 역사적 사실에 부합되지 않는다.

더욱이 ‘의암’이 존재하는 진주에서 그녀의 사당을 ‘의암사’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그녀의 고향인 장수에서 그러한 명칭을 사용하는 것 또한 여러 가지 면에서 조화(調和)되지 않는다.

현장에서 우리 일행을 맞아준 문화관광 해설사에게 필자가 쓴 글 등을 건네주며 시정 운동을 권유하였더니 반색하며 감사함을 표하였다.

물질만능의 산업사회에 살다보니 개인은 물론이고, 지방 정부들도 경제문제에만 매달릴 뿐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는 일에는 별무관심(別無關心)이다.

그러나 먼 미래를 볼 때 지금 놓치면 영원히 묻혀져 버릴 역사 왜곡을 바로잡는 것은 민족문화 창달에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다.

광주유학대학에서 호남유학연구소를 설립한 목적이 여기에 있으며, 이러한 일에 의향(義鄕) 광주인(光州人)들이 보다 많은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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