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로 읽는 전라도 역사기행]나주 ‘장고분’ (長鼓墳) 어느시대 누구의 무덤인가?

‘죽음, 기억의 공간’에 담긴 수수께끼같은 역사 이야기

2022년 02월 17일(목) 19:23
국립나주박물관 옆에 위치한 마한시대 유적 나주 반남고분군. <국립나주박물관 제공>
올해 초 나주 광주-강진 간 고속도로 건설 현장에서 앞은 네모지고 뒤는 둥근 형태의 ‘장고형(長鼓墳)’ 고분이 발견됐다. 전통 악기인 장고를 닮아 ‘장고분’(長鼓墳)이라고도 일컬어지고 있지만, 전형적인 일본의 고대 무덤 양식으로 ‘전방후원분’으로도 불리기도 한다. 시신을 묻는 봉분 주변은 둥글게 쌓고 앞쪽에 사각형 단을 마련해 제사를 지내는 독특한 무덤 양식이다. 지금까지 영산강 유역에서 14기의 장고형고분이 발견됐지만, 내륙지역인 나주에서 확인된 건 처음이다. 일본의 고대 고분 양식이라 1980년대 중반 이후 영산강 유역에서 속속 알려진 장고분은 학계에서 다루기 힘든 ‘뜨거운 감자’다.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 다양한 연구논문이 쏟아졌었다.

-일본의 고대 무덤 양식, 국제적 문화유산-
6세기로 추정된 나주 장고분은 ‘누가 만들고 묻혔는지?’에 대해 40년째 이어지고 있는 논쟁에 또 다른 방식으로 전개될 것으로 전망된다. 기존 영산강 유역 해안가에서 발견됐던 것이 내륙에서 발견된 첫 사례여서 더욱 논쟁거리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열쇠 모양과 비슷한 독특한 양식인 장고분은 일본에서 유래했다는 데 이견은 없다. 고고학적인 측면에서 일본은 4세기 무렵 이후는 고분(古墳)시대로 일본 열도 곳곳에 등장하며, 한반도 장고분보다 훨씬 빠르고 고분의 수도 통계가 불가능할 만큼 많다.

무덤의 기원(起源)은 일본에서 시작됐지만, 무덤을 쌓은 사람은 일본인(왜인)이냐, 한국인(마한의 토착세력)이냐 하는 것이다.

장고분은 한반도에서는 5세기 전반-6세기 전반, 즉 약 100년도 채 안 되는 기간 ‘반짝’하고 등장했다가 사라져 버린 묘제이다. 더군다나 영산강 유역에서 나주 장고분을 포함하여 15기만이 조사됐다. 반면 일본엔 2천여 기나 확인 조사됐고 조성 시기도 3세기 중반-6세기 후반까지다.

장고분에 만든 주체가 한국인지, 일본인지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지금까지 학계에서 언급되고 있는 다섯 가지 사례를 알아보자.

가장 설득력이 있는 설은 일본에 살았던 왜인이 영산강 유역으로 망명한 설이다. 일본의 정치 사회적 변동 때문에 일본 열도에서 거주하기 어려워진 사람들이 넘어온 견해이다.

두 번째는 삼국시대 토착 세력자 설이다. 서울·경기 지역에 있던 백제가 남하하자, 위기감을 느낀 영산강 유역 토착 세력자들이 왜와 교류하면서 도입했다는 설이다.

세 번째는 영산강 유역과 일본 야마토 정권 사이에서 교역을 담당하기 위해 파견된 왜인이라는 견해도 있다. 다음은 백제의 웅진(공주) 천도 후 영산강 유역에 대한 장악력이 감소하자 백제가 토착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파견한 일본계 백제 관료가 축조했다는 설이다.

마지막으로 일본 열도에서 거주하다가 귀국한 백제인이 축조하였다는 설도 있다.

이처럼 다양한 논란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내륙인 나주지역에서 장고분이 발견됨에 따라 두 번째 설에도 무게가 실릴 것으로 예상한다.

시기와 축조방식, 그리고 출토유물 등을 기반으로 살펴보면 어느 정도 궁금증은 풀리지만 해답은 없다. 그래서 다양한 학계의 의견을 검토해 보자.

먼저 한국인이라는 설은 무덤의 주인공이 영산강 유역에서 살았던 마한 토착세력의 수장이라는 것.

5세기 말 6세기 초 마한 출신의 토착세력 수장이 왜(일본 규슈지방)와 교류를 강화하면서 왜의 장고분을 썼다는 주장이다. 5세기 말이라면 475년(개로왕 21년) 고구려의 침공에 백제 한성이 함락되면서 백제의 국세가 약화했던 시기와 맞물린다. 혹은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한 백제의 남하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마한 출신 토착세력이 왜의 묘제를 썼다는 견해도 있다.

무덤 주인공이 아예 일본인이라는 주장은 일본의 야마토 정권이 영산강 유역에 사람을 보내고, 그들이 고향의 무덤인 ‘전방후원분’을 쓰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다.

지금까지는 일본인 무덤이라는 게 지배적이었지만, 최근에 나주 내륙에서 발견됨에 따라 토착세력의 무덤일 수도 있다는 연구가 시작될 것으로 기대된다.

일본 열도로 이주해간 한반도계 사람 중 가야인들이 왜와 야마토 정권을 세우자 격변기에 북규슈에 살고 있던 마한 출신 이주민이 망명객 신분이 돼 고향인 지금의 전남으로 돌아와 토착세력이 될 수 있다는 가설에 무게가 실릴 수도 있다.


- 영산강을 통한 다채로운 국제성 엿보다 -
종합해 보면 5세기 말-6세기 전반 영산강 일원은 지금 우리의 상상보다 훨씬 개방적이었을 것이다.

일본을 방문한 백제인이 거대한 일본의 장고분을 보고 돌아와 그와 비슷한 무덤을 조성했을 수도 있다. 또한 ‘외국인 우대정책’을 편 백제의 조정에 출사해서 백제 관료 혹은 귀족이 된 왜인의 무덤일 수도 있다.

단순히 외형과 구조가 유사하다는 것만으로 축조집단을 왜인으로 파악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영산강 유역은 해안에서 내륙으로 연결되는 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양한 관점으로 고분의 축조집단을 파악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으로 제기된다.

장고분의 출토유물은 대다수가 전남 지역의 산물이다. 삼국시대 고분군에서 보이는 현상과 전혀 다른 점은 묻힌 자가 그 지역에 살았던 토착 유력자임을 시사한다.

5-6세기 영산강 유역에 국제적인 새로운 묘제가 보급됐다는 것은 일본 북 규슈 석실의 발전형과 일본 고유의 전방후원형 봉분을 도입했음을 의미한다. 당시 영산강 유역은 지리적으로도 극동아시아 물류의 중요 거점대로 보인다. 즉, 중국의 연안 지역에서 한반도 서·남해안을 거쳐 일본 북 규슈 연안에 이르고 거기서 다시 일본 열도 각지로 통한다.

따라서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에 물류와 거기에 수반된 문화 흐름의 가장 중요한 거점지역 중의 하나가 서·남해안을 가르는 영산강 하구 중심의 전남의 해안지역이라고 볼 수 있다.

주로 이 해로를 통해 한반도의 문물이 일본에 전파돼 일본 고대문화 형성과 발전에 중요한 토대를 이뤘다. 그러나 국제적 문물 교류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일본의 고분문화도 어느 정도 한반도로 유입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장고분은 당시 영산강 유역과 일본 북 규슈 사이의 고분문화 교류 차원과 더불어 종래 독특하게 독널 고총을 축조했던 것처럼 전남 지역의 국제적인 개방성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국제적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신광재 역사문화전문기자는 대학에서 고고학과 한국미술사, 한국사를 전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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