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마당]찰나의 망각 / 수필 - 문예자 |
| 2022년 02월 21일(월) 18: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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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일이긴 하지만 지금도 생생한 사건 하나가 있다. 집안에 쥐가 돌아다니던 시절이라 다락에서 찍찍거리는 소리가 난다고 어머니는 쥐 잡을 먹이로 비스킷에 물약을 적셔 접시에 올려놓고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일주일도 훨씬 지난 무렵 여섯 살 짜리 손녀가 다락에 기어올라가 ‘웬 비스킷?’하고 들고나와서 맛있게 먹더란다. 그제야 쥐약 발라 놔둔 비스킷 생각에 놀란 나머지 아이만 들쳐업고 무작정 뛴 것이다. ‘119를 불러야지…. 119가 몇 번이지?…’ 혼자 중얼거리면서 병원까지 도착했는데 손녀 이름도 생각나지 않고 병원에 왜 온 것인지조차 모르겠더란다. 애를 업고 산발한 채 뛴 정신 나간 할머니 취급을 당한 것이다. “할머니, 아들 이름은?” “숨 좀 고르시고 이야기하시게 저쪽에 가 계셔요” 병원에 온 것임을 눈치챈 손녀는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했지만 차례는 자꾸 뒤로 밀려난 걸로 봐서 위급 상황은 분명 아니었다. 쥐약 묻은 과자를 먹고 손녀 죽는 줄 알고 놀란 어머니의 무용담 아닌 이야기는 훗날 가끔 화젯거리가 되었다. 그 사건 이후에도 별 탈 없이 아주 건강하게 잘 사셨다.
오랜만에 귀국하는 필자의 동생이 기내에서 양주 한 병 사고 지갑도 잘 챙겨 넣었는데 집에 도착해서 짐들 정리하고 난 후 지갑을 찾으니 없더란다. 온통 트렁크를 다 뒤지고 행동반경을 유추해 보았지만 행방이 묘연했다. 그래서 우선 지갑 속의 중요서류와 카드를 지급 정지시키고 혹여 기내분실도 염려되어 공항에 연락하고 그야말로 한바탕 난리를 쳤다. 가져온 달러도 얼마간 들어있었지만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일주일쯤 지난 후 가족 모임이 있다기에 방 청소하려고 옷걸이를 옮기는데 뭔가‘툭’ 떨어지는 게 검정 지갑이 아닌가? 얼른 펼쳐보니 정지시켜놓은 서류며 카드며 달러가 얌전히 그대로 들어있었다. 지갑을 뒷주머니에 깊숙이 넣고 다른 바지로 갈아입은 후 옷걸이에 걸어둔 것 자체를 까마득하게 잊어버린 것이다. 다른 곳만 이 잡듯 뒤진다고 나올 리가 있을 것인가. 바지를 바꿔 입은 사실 자체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니, 그래서 애꿎은 트렁크만 뒤졌고 잃어버린 것으로 취급한 것이다. 이 정도 건망증이면 중증에 해당되겠지.
얼마 전의 일이다. 외출하려는데 핸드백이 보이질 않는다. 항상 놓아둔 자리에 있어야 하는데 온 방 안을 다 뒤지고 자주 열지 않던 옷장 구석구석까지 살폈지만 보이질 않자 성질이 나고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누구를 탓할 일이 아니다. 도둑이 든 것도 아니고 괜히 현관문만 여닫아본다. 모든 물건은 제자리에 그대로 있는데 이상한 일이다. 인감에, 카드에, 연락처 수첩까지 다 넣어놨는데 이럴 때 핸드폰이라도 넣어놓았으면 울리는 벨 소리를 따라가 확인할 수 있으련만 핸드폰은 내 손에 꽉 쥐고 있다. 감쪽같이 핸드백만 사라진 것이다. 우선 다른 것이라도 들고 나갔다 와야겠기에 건넌방에 가보니 벽에 핸드백이 걸려있지 않는가. ‘너, 왜 거기 있는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건넌방에 간 적이 없다. ‘잘 생각이 나지 않는데요-’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는 말이다. 이쯤이면 나도 중증임이 분명하다. 대문 열쇠는 아예 핸드폰에 매달고 다닌다.
그런데 바로 엊그제 일이다. 막 외출하려는데 집 전화가 와서 통화한 후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핸드폰도 함께 얌전히 그 곁에 내려놓고 집을 나선 것이다. 대문을 꽝 닫고 뒤돌아서 몇 발자국 내딛는 순간 ‘내 핸드폰?’ 집에 들어갈 수가 없다. 일단 밖에 일을 보는 동안 내내 집에 들어갈 방법을 연구하느라 안절부절이었다.
이웃의 의자 하나 빌려다가 담벼락에 붙이고 월담하려 해도 어림없었고 나이 든 내 꼴이 개꼴이 되었다. 그때 마침 외출했다 돌아오던 뒷집 언니가 어려움에 처한 나를 구해주는 수호천사가 되었다. “담 뛰어넘을 나이는 아닌데 뭐 하다가 쫓겨나서 볼썽사납게 우왕좌왕하는 짓이야.” 하면서 웃긴다고 놀린다. 자기 집에 따라오라면서 빌려준 사다리를 타고 화단 쪽으로 뛰어내렸다. 뱃살이 꼿꼿해지고 발목이 시큰거리고 꽃나무도 하나 부러졌다. 제기랄, 이런 정신으로 뭘 하겠다고 덤벙거리는가. 한심하다. 치매인가? 깜빡거리는 머릿속 스위치가 작동이 더딘 것이 아닌가? 보기 싫은 사람이나 귀찮은 일은 오래 기억되어 마음 아프게 하는데 어찌하여 필요한 것은 순간 전혀 입력이 안 되고 깜빡하는지 모르겠다.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으니 손발이 고생을 한다. 순간의 심한 망각이 일어나는 것도 공해 탓일까? ‘너도 내 나이 되어 봐라. 큰소리 칠 일이 따로 있을 것이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다. 나이 탓으로만 돌릴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약 력-
▲ 수필문학 천료 등단
▲ 한국문인협회원, 광주문인협회원
▲ 한국수필문학추천작가
▲ 징검다리수필문학회장, 전남여고 문인회장 역임
▲ 수필집 : ‘제가 곧 나으리이다’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