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마당]머물고 싶은 곳 / 수필 - 이연순

2022년 03월 21일(월) 19:51

내겐 이름조차 생소한 함양 벽송사.

번잡한 곳보다 조용히 쉬기에 좋은 곳을 찾아 빗속을 장장 3시간이나 달려오니 아스라이 올려다보이는 가파른 산중 길이 앞을 가로막는다. 비에 젖은 비탈길이 마치 힘겨운 인생길의 여정처럼 버티고 있다. 어렵사리 도착해 보니 산허리를 휘감은 운해 위로 솟은 지리산 정상이 바로 눈앞이다.

벽송사는 해인사의 말사로써 지리산 칠선계곡 깊은 골짜기에 있다. 요즘엔 지리산 둘레 길의 한 구간이지만 한국전쟁 때는 인민군 야전병원으로 전쟁의 한 중심에 서 있었다고 한다.

이 절의 특이한 점은 모든 전각들이 단청을 하나도 하지 않은 나무의 질감 그대로다. 화려함을 외면한 소박한 건물들이다. 오래된 것들에는 나름의 아늑함이 있다. 낡음이 주는 선물이다.

범접하기 어려운, 깊고 고요한 진중함이 와 닿는다. 이 특별함에 마음이 끌린다. 멀리 앉아 바라보고만 있어도 좋다. 나를 가득 채워주는 이 알 수 없는 감정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빛바랜 모습 그대로의 울림은 종교를 떠나 미욱한 사람의 무심한 가슴에도 인생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한다. 진중함과 가벼움의 온도 차이를 알아가는 것이 삶일까?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을, 삶이란 그 간단한 말로 축약할 수 있을까?

전각들을 뒤로하고 삼층석탑이 있는 곳에 오르니 널찍한 사지가 벽송사의 옛 위상을 상상케 한다. 저녁 바람이 시원하다. 아래를 굽어보니 산사의 주변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미인송과 도인송이라는 두 그루의 소나무가 마주 보고 서 있는데 싱싱한 청엽들이 벽송사의 오랜 역사와 성쇠를 이야기하고 있는 듯 바람에 흔들리며 수런거린다.

지리산은 온통 운해 속에 묻혀 겨우 보이는 정상이 아니라면, 누구라도 하늘로 착각할 것만 같다. 깃털 같은 구름들이 비천상을 그리며 사방으로 흩어진다.

비록 여기에 기거하시는 분들이라도 이런 신비스러운 광경을 매일 볼 수 있는 것은 아닐 것 같은데 막 도착한 우리가 이 몽환적인 정경을 볼 수 있었으니 빗속을 달려 여기까지 온 보람은 충분히 보상받은 것 같다. 이 산사에 머물며 오래도록 살고지고 싶다는 부질없는 욕심을 내본다.

깊은 산사에 어둠은 빨리 찾아왔다. 각방에 머물고 계신 템플스테이를 온 사람들은 빈방처럼 조용하다. 절에서는 밤 아홉 시가 되면 소등을 해야 한다. 널찍한 방에 누우니 잠자리가 바뀌면 쉬 잠들지 못하는 예민한 나도 뒤척이지 않고 어느새 잠이 들었다.

손뼉을 치며 아침 공양을 알리는 조용한 소리에 깨어보니 새벽 다섯 시다. 누룽지 한 공기가 속을 부드럽게 해주었다.

산사(山寺)의 아침은 모든 것이 정지된 듯 고요함 그 자체였다.

어제 저녁녘에 운무에 싸여 보이지 않던 산도, 하늘도 구름 한 점 없이 깨끗이 단장한 새 얼굴이다. 어제의 그 신비스러움은 사라졌다. 우아한 몸짓으로 피어오르던 비천상도 상황에 따라 보여주는 어느 단면이었듯이, 우리가 정말 괜찮다고 보았던 사람도 그때그때의 상황이나 상대에 따라 수시 변함이 이와 같을 것이다. 누구나 한결같을 수는 없고 한 모습이 전부일 수는 없는 것처럼!

벽송사의 인상을 사람에 비유하자면 도리와 규범에 어긋나지 않는 사람. 기품이 느껴지는 나이 든 어르신. 비록 빈궁해도 대의를 잃지 않는 지성과 감성을 겸비한 그런 사람을 만나는 느낌이었다. 적막하리만치 조용한 벽송사를 에워싸고 있는 진정한 아름다움은, 평온함이었고 자연스러움이었다.

이 세상엔 볼거리도 먹을거리도 많다. 그런 곳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보고 스쳐 가는 곳과 머물고 싶은 곳은 다르다. 벽송사는 어떤 것도 인위적이지 않다. 소박한 모습 그 자체만으로 마음속에 찌든 것들을 한 꺼풀 벗겨 낸 개운함을 느끼게 해주는 곳이다.

부질없는 것에 얽매여 작은 것의 소중함을 놓칠 때가 많다. 잡다함이 마음을 차지해버리기 때문이다.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비우는 조촐한 여행이 좋은 것 같다.

비록 하룻밤 하룻날의 생활이었지만, 벽송사는 내가 늘 마음에 그리던 ‘인적 드문 조용한 곳에서 한동안 쉬었다 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채워주는 곳이었다.

내 마음이 내 뜻대로 잘 다스려질지는 모르겠으나 벽송사에서 받은 느낌대로 소박하고 진솔하게 물 흐르듯 순응하며 고요하게 살고 싶다.

<이연순 약력>
▲ 2004년 ‘수필문학’ 등단
▲ 한국문인협회, 광주문인협회 회원
▲ 경북일보 문학대전 수필 입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