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설 몇 마디 - 박덕은 문학평론가 |
| 2022년 03월 21일(월) 19:51 |
김석문 시인의 시 ‘어느 낙락장송의 죄’에서의 시적 화자는 새벽에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리는 낙락장송 한 그루를 관찰하고 있다. 낙락장송에게 ‘잘났다는 죄목을 씌워 수백 년 살아온 탯자리를/하루아침에 포크레인으로 파헤치고 뽑아내’ 가져간다. 탐욕의 스위치가 켜지면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지 않는다. 탐욕가의 입맛에 맞게 ‘거추장스런 손발은 무참히 잘라버리고, 처매어져/움쩍 못하도록 꽁꽁 묶어’ 끌고 간다. 이유도 모른 채, 어디로 끌려간지도 모른 채 끌려가는 서러움이 느껴져 마음이 아프다. 독재 정권 시절 민주주의를 부르짖다 반역죄로 몰려 끌려갔던 민주투사들이 떠올라 슬프다. ‘처참한 몰골로 발버둥치며 가’야 했던 그 시절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하다. 시적 화자는 ‘오랏줄에 묶여 형장으로 끌려가던 나으리’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못하다. 낙락장송이 어디에 모셔질지는 모르겠지만, 그 치유 과정이 얼마나 힘들까 안타까워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마을 사람들 앞에서 송두리째 눕혀 놓고 손발까지 잘라 버리는 그 모습이 가슴 아리게 한다. 누군가의 탐욕으로 한 생이 조롱당하고, 독재 정권의 탐욕으로 한 생애를 조롱당했을 민중들의 아픔이 다가와 아프다. 시를 통해 사회 구석 구석의 아픔을 들여다보고 공감하는 시의 특질을 만날 수 있어 행복하다.
▶동시 ‘마음의 숙제’
윤삼현 시인의 동시 ‘마음의 숙제’에서의 시적 화자는 3월과 마음의 소재를 통하여 깨달음 하나를 얻어내고 있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푸르름이 짙어’ 오는 3월은 풀잎 흔들고 꽃망울 터뜨리며 온다. 그 환한 봄날에 시적 화자의 ‘마음이 외투를 벗는’다. 마음의 외투를 벗는 그때가 진정한 봄이다. 모든 게 가벼워졌기에 ‘가뿐히 하늘로 솟’을 수 있다. 시적 화자는 ‘기다렸다는 듯/마음의 키가 크’고 기나긴 겨울을 견디며 살아온 삶의 마디만큼 환하게 물든다. 아픈 기억들로 가득 찬 계절도 기다렸다는 듯 봄이 되는 3월이다. 우리도 두근거리는 봄빛 하나 마음에 품어 하루를 환하게 반짝이고 싶다. 시적 화자는 이 모든 변화가 왜 일어났는지 궁금해 하늘을 쳐다보고 마음을 들여다본다. 자연스럽게 마음의 숙제 하나를 독자들에게 던지고 있다. 동심의 프리즘을 통해, 사색의 공간으로 이끌고 있는 솜씨가 세련되어 있다. 마음의 외투라는 착상도 신선하여 독자들의 마음속으로 파고들고 있다. 동시를 통해 마음이 맑아질 뿐만 아니라, 이토록 깨달음 하나를 얻어낼 수 있다면, 최상이 아닐까.
▶시조 ‘호반새 나는 아침’
이전안 시인의 시조 ‘호반새 나는 아침’에서의 시적 화자는 호반새 나는 아침을 묘사하고 있다. 소꿉놀이하던 열서너 살 소녀는 ‘첫 달거리 붉은빛을 오는 봄에 매’달면서 여자가 되기 시작한다. 여자라는 신생의 새벽이 열리기 시작한다. 그 ‘새벽 가르고 호반새 나는 아침’이 두려우면서도 환희에 몸을 떨게 한다. 온몸이 붉은색을 띤 호반새의 날갯짓과 겹치면서 여자가 되어 가는 신생의 새벽이 신비롭게 다가온다. 소꿉놀이 뜨락의 소녀 몸의 변화, 능금나무 우듬지의 갈마바람이 앉아 노는 모습, 초록빛 봄이 뒤뜰에 찾아와 수런대는 모습 등이 이미지 구현으로 잘 그려져 있다. 첫 달거리 붉은빛, 붉은색을 띤 호반새, 붉은색의 능금나무 열매, 연두잎, 생금(生金), 초록빛 봄, 멧노랑나비의 여러 색깔을 통해서 봄이 환하게 다가온다. 아름답게 채색된 한 폭의 봄이 시어의 붓끝에서 그려지고 있다. 표현 하나 하나가 신선함을 안고 있어 좋다. 시조의 율격을 유지하면서, 싱그러운 묘사와 선명한 이미지 배치를 통해 시조의 품격을 한층 높여 놓고 있다. 시조가 이처럼 이미저리와 손잡으면 지극히 우아한 작품이 될 수 있음을 입증해 주고 있어, 흐뭇하다.
▶수필 ‘머물고 싶은 곳’
이연순 수필가의 수필 ‘머물고 싶은 곳’에서의 서술자는 함양 벽송사에서 하룻밤 머물렀던 때를 회상하고 있다. 해인사 말사인 벽송사는 지리산 칠선 계곡에 있다. 단청하지 않은 전각들, 그 아늑함, 깊고 고요한 진중함 등이 마음에 든다. 삼층석탑, 미인송과 도인송, 운해에 싸인 지리산, 몽환적인 정경, 정지된 듯 고요함 그 자체인 산사의 아침 등도 아주 인상적이다. 서술자는 ‘오래된 것들에는 나름의 아늑함’이 있다고 한다. ‘범접하기 어려운, 깊고 고요한 진중함이 와 닿는’다고 말한다. 신기하게도 우리는 산사山寺에 들어서면 사바세계 휘돌아 온 울음도 고요해질 것 같다. 딱탁 울리는 목어 소리에 모든 업보가 허물어지고 무표정한 하루가 따스해질 것 같다. 그런 느낌들을 서술자는 ‘멀리 앉아 바라보고만 있어도 좋다. 나를 가득 채워 주는 이 알 수 없는 감정’이라고 말한다. ‘빛바랜 모습 그대로의 울림은 종교를 떠나 미욱한 사람의 무심한 가슴에도 인생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기에 우리의 걸음은 산사로 향하는 게 아닐까. 저녁과는 다른 아침 산사의 정경을 보면서 서술자는 ‘누구나 한결같을 수는 없고 한 모습이 전부일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수필의 맛이 맛깔스럽다. 정경에서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글의 봉제선이 보이지 않아 자연스럽고 좋다. 억지스럽게 글을 박음질하지 않아 멋스럽다. ‘기품이 느껴지는 나이 든 어르신’처럼 그 어떤 것도 인위적이지 않은 벽송사. 소박한 모습 그 자체만으로도 개운함을 느끼게 해주는 벽송사, 거기서의 하룻밤 하룻날의 체험이었지만, 오래도록 머물고 싶은 곳이라 여겨졌고, 그 때문에 소박하고 진솔하게 물 흐르듯 순응하며 고요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수필의 특질을 잘 유지하면서, 독자들의 마음문을 소르르 열게 하는 솜씨가 세련되어 있다. 서술자의 깨달음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게 된 독자들도 함께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