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목을 잡고 뛰어가려는 사람들 / 하정호

2022년 05월 02일(월) 20:07

하정호 마을교육공동체 활동가

여기 이 사람을 보라. 무엇에 쫓긴 듯 마음이 무지 급하다. 서둘러야 하는데 생각대로 발이 움직이지 않는다. 마음은 저만치 앞서지만 발이 굼뜨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급기야 엉거주춤 발목을 손으로 잡고 한 걸음 한 걸음씩 떼어놓기에 이르렀다. 마음이 급할수록 머리는 땅에 처박을 듯 앞으로 쏠리고 엉덩이는 또 넘어지지 않으려 뒤로 비쭉 나온다. 발목을 잡고 허리 숙여 뒤뚱거리는 꼴이 사람들 비웃음을 사기에 딱 알맞다.

세상에 어떤 바보가 이런 우스꽝스러운 꼴을 할까만 내 보기에 지금 여야의 형국이 이러하다. 윤석열 당선자는 “일단 청와대 경내로 들어가면 제왕적 권력의 상징인 청와대를 벗어나는 것이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며 단 하루도 청와대에 발을 들일 수 없다고 버틴다. 여당은 또 당선자가 대통령이 되기 전에 ‘검수완박’을 서둘러야 한다며 국회를 몰아가고 있다. 경찰이 불송치 결정을 하면 고발인이 이의신청을 할 수 없도록 형사소송법을 고친다고 하니, 권력자들은 이제 경찰만 잘 구슬리면 공익신고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 검찰을 개혁해 적폐를 청산한다더니 애꿎게 사회적 약자들에게 더 억울한 세상이 되었다. 청와대 집무실 이전을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형사소송법 개정도 서두를 일이 아니다. 자신들의 안위보다 민생을 더 염려한다면 말이다. 머릿속 계산이 복잡하니 몸이 고생한다.

검찰이 살생부를 들고 제 입맛대로 상대를 골라서 수사해 온 것은 사실이다. 조국과 한명숙처럼 검찰의 먹잇감이 되어 짓이겨지고 뜯긴 사람도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청산해야 할 적폐가 소위 ‘빨간 당’에게만 있는 건 아니었다. 학동참사가 왜 거듭 일어나는지 광주 시민들은 알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 마지막 인터뷰에서 ‘살아있는 권력도 수사하라고 했다. 레토릭이었나 진심이었나’하고 손석희 앵커가 물었다. 역대 정부 가운데 이번 정부가 제일 깨끗하다는 식으로 대통령은 답했다. 부동산 정책 실패에 대해서는 “국내 부동산 가격 상승 폭이 전 세계 기준으로는 크지 않다”고도 했다. 다른 나라나 역대 정부와 비교하면 그게 사실일 수는 있다. 하지만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는 그렇게 남들과 비교해서 좀 더 나은 정도의 나라가 아니다. “늘 저쪽에서 항상 더 문제인데 저쪽의 문제는 보다 가볍게 넘어가고 이쪽에 보다 적은 문제들이 훨씬 더 부각되는 이중잣대도 문제”라는 게 대통령의 생각이었다니 놀랍다. ‘내로남불’ 아니었나 하는 앵커의 물음에 그런 식으로 답한다면, 어차피 피장파장인 싸움에 괜히 시민들만 헛물켠 5년이었다는 말인가.

뮌히하우젠이라는 허풍선이 남작이 독일에 살았다. 말을 타고 가던 그가 실수로 늪에 빠졌을 때의 얘기다. 어디 붙잡을 데가 없던 남작은 결국 자기 머리카락을 잡아 올려서 겨우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두 발로 꽉 붙들어서 타고 있던 말까지 건져냈다고 하니 참 대단한 사람이다. 이 우화에서 따온 ‘뮌히하우젠 트릴렘마’라는 게 있다. 어떤 주장을 정당화하려면 다른 근거를 들어야 하는데 그 근거가 되는 말도 또 다른 근거가 있어야 하니 그 근거 대기가 끝이 없다는 어려움을 말한다. 그런 무한논증에서 벗어나려고 하다 그냥 내 말이 맞다는 독단에 빠지거나, 근거로 주장을 정당화하고 또 그 주장으로 근거를 뒷받침하는 순환논증에 빠지기도 한다.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이 정당하려면 왜 상대가 적폐인지 밝혀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해방 당시에 친일청산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더 거슬러 올라가 정조 이후로 그래 왔다는 사람도 있었다. 의기양양하게 발본색원하겠다던 사람들이 결국 임기 마지막 국무회의까지 미루는 무리수를 써가며 허둥대고 있다. 왜 진작에 못 했느냐는 말에는 또 그 만큼 우리 사회의 적폐가 뿌리 깊다고 둘러댄다. 적폐를 청산하겠다고 정권을 잡았는데 청산에 실패한 것도 그 적폐 때문이라니, 그런 변명 듣기가 짜증나서 심판한 정부이다. 그런데도 문재인 대통령은 도리어 “나는 한 번도 링 위에 올라가 본 적이 없다. 입도 뻥끗할 수 없었다”며 선거의 패인을 엉뚱한 데서 찾았다.

결국 우리는 순환논증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걸까? 아니다. 말싸움의 늪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뜻밖에 간단하다. 그렇게 따질 시간에 하나라도 제대로 실천하면 된다. 주장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증명할 수밖에 없다. 가야 할 길은 먼데 느린 걸음이 문제인가? 그런다고 느린 발을 손으로 잡고 뛰어갈 수는 없다. “이 대한민국의 정의를 어떤 특정한 사람들이 독점할 수는 없는 것”이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말은, 비단 한동훈 검사장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해당한다. 손발은 머리가 없어도 스스로 움직인다. 시민들을 믿고 역사를 믿으며 좀 늦게 닿더라도 눈을 들어 앞을 보자. 늪에서 나오고 싶다면 제 머리를 움켜쥘 게 아니라 그 손으로 상대에게 도움을 청해야 한다. 언제까지 남 탓하며 적대적 공생관계를 유지하며 살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