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42주년, 예순 살이 되었을 K군 / 박준수
2022년 05월 17일(화) 20:29
박준수 시인·경영학박사
5월 한복판 빛고을에 다시 슬픈 기억의 강물이 흐르고 있다. 저만치 무등산은 말이 없고, 거리 곳곳에 이팝나무들이 하얀 꽃잎을 피워 내고 있다. 시간이 멀어질수록 오히려 기억은 또렷해지는 역설의 순간이 찾아왔다.

5·18 42주년을 맞아 망각의 심연을 거슬러 K군의 얼굴이 생생히 떠오른다.

K군은 1980년 5월 광주 양동시장 인근에 자리한 허름한 자개공장에서 일하던 평범한 10대 소년이었다. 그는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공장에 취업해야 했다. 그 자개공장에는 K군 또래의 소년소녀들이 여러명 함께 일하고 있었다. K군은 그곳에서 하루 8시간 이상 프레스기계를 손으로 돌려 자개로 여러 가지 문양을 찍어내는 일을 했다. 열악한 작업환경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항상 해맑게 웃으며 동료들과 잘 어울렸다.

그의 부모님은 양동시장 인근 판자촌에서 일용직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하숙집을 운영했다. 형과 동생도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 정도로 가난한 살림살이였다.

- 자개공 K군의 짧은 생애 -
그러던 5월 어느 날 광주에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공수부대가 들이닥쳐 광주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짓밟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시민들이 너나할 것 없이 도청 앞으로 몰려가 항의시위를 벌이는 것을 목격하고 그도 대열에 합류하게 됐다. 그의 눈에 비친 도청 앞 현장은 생사가 오가는 전쟁터나 다를 바 없었다. 그는 처음으로 세상일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래서 그날부터 공장에 나가지 않고 시민군이 되어 광주를 지키는 일에 목숨을 걸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나 그의 불타는 투쟁은 오래가지 못했다. 도청 앞 발포로 그의 꽃다운 목숨이 산산이 부셔졌기 때문이다.

필자는 자개공장에서 잠시 함께 일했던 K군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큰 충격과 함께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죽음의 실체를 처음으로 느낀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42년이 흐른 지금, 필자는 5·18 민주묘지에 잠들어 있는 K군의 짧은 생애를 생각해본다. 그의 희생은 분명 한국 민주화에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다. 그를 비롯한 오월영령들의 고귀한 희생으로 민주화운동이 들불처럼 타올랐고, 마침내 민주정부가 수립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광주는 민주성지로서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 민주화운동특별법 제 개정으로 피해자 보상이 많은 부분 이뤄졌으며 진실규명이 본격화되어 신군부의 만행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아울러 그 전면에 있었던 전두환마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필자는 왠지 K군에 대한 무거운 마음의 부채의식을 떨칠 수 없다. 1980년 5월 이후 오늘날까지 광주민주화운동이 정치적 태풍으로 작용하며 새로운 정치세력을 형성하는 토대를 마련했지만 정작 희생 당사자들은 비참한 삶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모순을 겪고 있는 게 현실이다. 5·18 항쟁 당시 사망한 희생자의 대다수 유가족들은 이후 ‘폭도가족’으로 낙인찍혀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기 어려웠다. 당국의 감시 대상이 되었고 경제활동도 자유롭지 못했다. 특히 정신적인 충격으로 인해 반사회적 행동을 하거나 정신질환을 앓으며 피폐한 삶을 사는 경우도 있었다.

K군의 유가족도 이런 과정을 고스란히 겪었다. 아버지는 삶의 의욕을 잃고 무너졌고 동생은 정신병을 앓다가 사망했다. 어머니는 이곳저곳 떠돌며 술장사를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실제로 필자는 20여년 전 우연히 북구 용두동 어느 술집에 들렀다가 혼자서 주점을 운영하는 K군의 어머니를 조우하게 됐다. 당시는 K군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나 나중에 기억을 더듬어보니 K군의 어머니였다.

- 무거운 마음의 부채의식 -
5·18 유가족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K군의 경우처럼 대다수 유가족들이 극심한 트라우마를 겪으며 가족해체나 사회적 고립속에서 악몽같은 삶을 보냈다.

만일 K군이 살아있었다면 올해 회갑을 맞는 나이다. 그가 시민군에 동참하지 않고 묵묵히 자개공장에 다녔더라면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아 지금쯤 손자손녀들의 재롱을 보며 편안한 노후를 살고 있을 것이다.

5·18 민주화운동이 그간에 정치적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산자의 관점에서 주장되었다면 한번 쯤 죽은자의 관점에서 조명되어야 한다. 특히 직접 피해자와 유가족의 삶을 가슴으로 보듬는 진정성 있는 관심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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