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마당]그날을 헤아리며 / 수필 - 문향선

2022년 05월 30일(월) 19:25

아버지가 중국을 다녀오신 지도 벌써 여러 달이 지났다. 언제부턴가 아버지는 중국에 살고 계시는 고모님을 만나러 가신다고 벼르기만 하시더니 시절 인연이 도래하였는지 어느 날 가시게 되었노라고 전화를 하셨다. 그 전화를 받고 가슴이 두 근 반 서 근 반하더니만 며칠 동안 마음을 다잡을 수 없었다.

이번 가시는 길에 동행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요모조모로 생각해보았지만 끝내 생각으로 그치고 말았다. 남편보고 다녀오라고 여러 차례 권유해보았으나 이런저런 사유를 대며 선뜻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당신네 집안일이라면 이럴까 하고 섭섭한 마음도 들었으나 굳이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떠나시는 아버지를 전송도 못 하고 잘 다녀오시기만을 기원할 따름이었다. 그동안 모아두었던 많지 않은 원고료를 여비에 보태시라고 인편에 보내드렸다. 그리고 장롱 속에 넣어두고 입지 않던 옷들을 챙겼다. 새 옷이나 다름없는 입성이기에 친척들에게 전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아버지는 생각지도 않았는데 과용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고 염려하셨다.

이제 아버지는 오십여 년 만에 흑룡강성 수화시 고향 땅을 밟게 되었다. 세상이 그만큼 좋아진 것인가, 갈 수 없는 나라로 아예 포기하고 살았던 세월이었는데 이렇게 인천에서 배를 타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었다. 아버지가 수화시와 신의주에 가족을 남겨두고 아내와 젖먹이 두 딸을 데리고 정착한 곳이 머나먼 전라도 땅이었다. 일시적인 분단이 영원한 것이 될 줄도 모르고 살던 집에 자물쇠를 채우고 쉬이 돌아올 것처럼 그렇게 떠났던 길이었다.

아버지가 귀국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목포엘 내려갔다. 몇 장의 사진과 도수 높은 고량주를 아버지는 선물로 내주셨다. 내게는 특별한 선물을 하나 주셨다. 오석으로 만든 조선 가마솥 모양의 자그마한 공예품이었다. 어찌 보면 재떨이 같기도 하고 오목한 게 타구 같기도 하였다. 수수한 모습이 오히려 나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아버지가 중국에 들어가셨을 때, 마침 고모 집에 다니러 나오셨던 신의주에 사시는 작은 아버지와 맞닥뜨리게 되었다고 한다. 신도 해후를 준비하셨던가, 그때 작은아버지는 정표로 이 오석 공예품을 주신 것이었다. 지난(至難)한 세월을 목숨 부지하여 살아온 고마운 정으로 주기엔 아무리 보아도 초라한 물건이었지만 그것을 받아든 순간, 나는 왈칵 쏟아지려는 눈물을 다스려야만 했다. 몇 군데 금이 가서 갈라지긴 했지만 작은아버지의 애장품을 몇 번이고 쓰다듬어보며 그분의 숨결과 체취를 맡아보고자 했다. 그것을 어루만지는 동안 무언의 교감을 나누고자 했다.

어렸을 적에 어머니는 “넌 삼촌을 많이 닮았다”고 가끔 말씀하셨다. 잊고 있었던 그 말이 불현듯 되살아나며 아버지가 주신 사진 속의 작은 아버지의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바이올린을 들고 찍었던 젊은 날의 그 준수한 자태는 어디 가고 자그마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어디선가 눈에 익은 듯 만 듯한 그 얼굴은 바로 우리 식구의 모습이었다.

아버지는 통일이 되어 작은아버지와의 상봉을 꿈꾸며 노력해오셨다. 노구에 아파트 관리소장을 하시며 월급을 고스란히 모아 적금을 부으셨다. 그런 날이 올 것을 기다리며 준비하셨던 것이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아버지는 통일을 기도 제목으로 정해 놓으시고 오랜 세월 기도하셨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염원이 하늘에 닿아 우연찮게 만나게 되리라고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을까.

이제 아버지는 더 이상 젊지 않다. 세월이 아버지를 기다려주기엔 너무 많이 흘러가 버렸다. 통일에 대한 기대가 생전에 이루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음속에 키워온 통일에의 염원은 영원히 퇴색하지 않으리라.

조선 가마솥 모양의 오석 공예품을 책장 속 한 켠에 놓아두고 바라보기를 나는 즐긴다. 오석이라 눈에 잘 들어오기도 하고 내 시선을 붙들 만치 애틋한 사연도 간직하고 있다. 작은아버지는 “님을 보낼 때, 매화 한 송이 꺾어 보내지 못함이 못내 가슴 아프다.”고 하셨다지만 만나본 적이 없는 그분을 그리며 오래 살아 계시기만을 빈다. 오래만 사신다면 상면할 날이 올는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날을 헤아리며 사진 속의 작은아버지께 나는 자주 눈길을 맞춘다.


<문향선 약력>
▲ 광주문인협회 회원, 가교문학회 회장
▲ 제4회 올해의 작품상 수상
▲ 저서 : ‘오래된 시계’, ‘어느 책 읽는 사람의 이력서’

박덕은 문학평론가 ▲문학박사, 전남대 교수 역임 ▲중앙일보 신춘문예당선

- 평 설(박덕은 문학평론가) -
문향선 님의 수필 ‘그날을 헤아리며’에서의 서술자는 아버지와 작은아버지 얘기를 하면서, 남북통일에 대한 염원을 피력하고 있다. 아버지는 아파트 관리소장을 하며 고스란히 모은 돈으로 북에 남아 있는 동생과 상봉하는 꿈을 놓지 않았다. 드디어, 아버지의 꿈이 이뤄졌다. 수화시와 신의주에 가족을 남겨두고 아내와 젖먹이 두 딸을 데리고 피란을 떠나온 아버지, 그 한이 조금이나마 해소되는 순간이 온 것이다. 이 수필은 수백만 이산가족의 아픔이 응축되어 있어 마음이 아리다. 이산가족의 뼈아픈 그리움이 오석 공예품에 담겨 있어 더욱 애잔하다. 작은아버지가 준 조선 가마솥 모양의 오석 공예품. 그 공예품이, 그 조선 가마솥이, 그 그리움이, 아버지 손을 거쳐 서술자에게 왔다. 그 옛날, 가마솥에서 지은 밥으로 아버지와 식구들은 오손도손 아침을 열었을 것이다. 가마솥 뚜껑 틈으로 파르르 끓어오르는 밥내음에 식구들의 하루는 더 따스했을 것이다. 그 하루를 작은아버지는 그리워했을 것이다. 허기진 그리움을 채워 주는 가마솥, 뚜껑을 열면 금방이라도 밥내음 가득한 식구들의 웃음소리가 들릴 법한 가마솥, 그 가마솥 모양의 공예품을 작은아버지는 아버지에게 선물한 것이다. 보글보글 끓어올라 환해지는 고향이 보일 듯한 가마솥 모양의 공예품을 아버지는 딸인 서술자에게 다시 선물한다. 이산가족의 서러움을 풀어달라는 듯 이산가족의 그리움을 알아달라는 듯 그 공예품은 서술자와 자주 눈길을 맞춘다. 독자들도 함께 가마솥 모양의 공예품에서 이산가족의 아픔과 역사의 체취를 맡게 되고, 남북통일을 기원하게 된다. 부디, 그 염원이 하늘에 닿아 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더 늙기 전에, 아니 돌아가시기 전에 부디 식구들과 함께 상봉하기를 바래본다. 이는 서술자 혼자만의 염원이 아니기에, 우리 모두 안타까워하는 게 아니겠는가. 언젠가는 꼭 남북 평화통일의 그날이 오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