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온한 상상력의 사회 / 천세진 |
| 2022년 08월 21일(일) 19: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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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한국을 만든 세태 변화 속에서 수많은 사회적 화두들이 등장했다가 사라졌는데, 그 부침 속에서도 ‘상상력’과 ‘문화’는 족히 20년 이상 한국의 세태 변화를 결정하는 가장 빛나는 화두였다. 공공과 민간을 막론하고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홍보 문구가 난무했고, 문화가 붙지 않은 공간, 시간, 사업을 찾기 어려웠다. 그 덕분에 한국이 문화강국이 되었다는 분석이 열이면 아홉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제 질문을 던져보자. 문화는 약하고 강한 것이 존재하는가? 상상력과 문화는 어디든 이름을 붙여도 될 만큼 무조건 좋은 것인가? 이런 질문들에 대해 현재와 같은 경제적 지위와 한류 열풍을 탄생시킨 한국의 세태를 긍정과 자부심으로 바라보는 이들은 ‘맞다!’라는 답을 외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필자는 모든 질문에 ‘아니다!’라고 답하고 싶다.
상상력과 문화를 사물에 대입해서 설명한다면, 요즘 각광받고 있는 친환경 전기자동차가 적당할 것 같다. 전기자동차가 내연기관 자동차를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대체하는 것처럼, 상상력은 이전의 시스템을 전복해버린다. 그런데 상상력과 문화의 궁극적 목적은 뒤집어엎는 것에 있지 않다. 전복된 이후에 만들어진 시스템과 문화가 인간을 포함한 생명계에 좋은 것이어야 하고, 평등하고 자유로운 가치를 담은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상상력의 발휘와 문화 변동이 정당성을 갖는다.
전기 생산 과정이 내연기관 자동차보다 친환경적이어야만 전기자동차가 친환경자동차라는 명칭을 얻을 자격이 생기고, 그런 시스템으로의 전환(문화 변동)이 명분을 얻는다. 그게 아니라면 그건 기술적 개발 놀이에 불과하다. 상상력과 문화도 마찬가지다. 고작 상품을 더 팔아먹는 것에 동원된다면 타락한 기술적 수사에 불과하고, 저열한 키치Kitsch에 불과하다. 한 사회가 갖고 있는 상상력과 문화는 열풍을 만들어내는 역동성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만들어내느냐에 있다.
문학, 미술, 음악을 창조하는 예술가는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해도 된다. 빛나는 상상력을 발휘한다 해도 대부분 겨우 궁핍이나 면할 테고, 사회에 미치는 영향도 미미할 테니까. 하지만 정치인과 공직자의 상상력은 곧바로 중대한 사회적 변화와 파장을 일으키기 때문에 함부로 발휘하면 안 되고, 발휘하더라도 상식적이어야 한다. 국민이 수해로 고통을 당한 현장에서 사진이 잘 나올 수 있도록 비가 쏟아지기를 바라는 불순한 상상력, 중국에서 불어 닥친 어마어마한 양의 미세먼지를 처리하겠다고 도시 곳곳에 실외 공기청정기를 설치하겠다는 무모한 상상력, 5살짜리를 경쟁시스템에 서둘러 집어넣겠다는 잔혹한 상상력은 정치인과 공직자가 가져야 할 상상력이 아니다. 온전히 좋기만 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상상력과 문화도 마찬가지다. 발휘하고 만드는 과정 속에 인간과 생명체에 대한 공감이 배제되고, 결과물이 전 지구적 공동체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 기업과 계급에게만 이익이 되는 것이라면 결코 좋은 것이 아니다.
원자폭탄을 비롯한 전쟁 무기와 독성 화학물질들도 상상력이 낳은 것이고, 전 세계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약자들과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무자비한 폭력도 모두 문화의 얼굴을 갖고 있다. 상상력과 문화도 과정과 결과에 따라서 선과 악이 결정되어야 한다. 그런 이치를 무시하고 상상력을 발휘하라고 닦달하는 것은 천박한 무지와 불감증에 걸린 폭력의 발현에 불과하다.
걱정스럽다. ‘상상력’과 ‘문화’가 영역을 가리지 않고 오용되고 있고, 온 나라가 기괴한 상상력이 만들어낸 문화에 깊이 침윤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한국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기괴한 상상력의 사회 속에서 살고 있는지를 모르는 것 같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권력 쟁취와 경제적 이익을 위해 닦달하는 불온한 상상력의 문을 닫고, 끔찍한 현실을 개선하려는 따뜻하고 상식적이고 선한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