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한가위 야외 공연으로 만난 ‘시간을 칠하는 사람’ 관객과 호흡,기억을 따라가는 ‘오월 여행’ ‘그 날’의 상흔 간직한 아픈 가족사 진한 울림 실감나는 열연·이동식 무대 등 몰입도 높여 글·사진=최명진 기자

2022년 09월 12일(월) 19:03

지난 11일 ACC 아시아문화광장에서 열린 연극 ‘시간을 칠하는 사람’

“그럼, 내가 아빠 그려줄게. 사라지지 않게. 그림으로 그려두면 사라지지 않아.”

전남도청이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시간을 칠하는 사람’이 추석을 맞아 야외공연으로 광주를 찾아왔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재단(ACC재단)은 기존 실내 극장용을 야외 공연으로 재제작해 지난 6월 세종을 시작으로 밀양, 진주 등에서 무대를 올렸다. 그리고 지난 9-12일 광주 공연을 끝으로 올해 투어 일정을 마무리했다.

추석 연휴인 지난 11일 오후 7시께 찾은 ACC 아시아문화광장.

사전예매한 티켓을 받아든 시민들의 행렬이 출입구 앞으로 길게 늘어섰다.

“오매. 우리 관객들 저짝으로 잘 안내해주쇼잉.” 줄지어 입장하는 중에도 배우들의 정겨운 입담이 오고갔다.

할머니 분장을 한 배우들이 관객들에게 살갑게 말을 붙이기도 하고, 공연 소품으로 쓰이는 하얀 벽에 낙서를 하는 어린 주인공의 모습도 미리 만나볼 수 있었다.

공연은 관객들과 가까이서 호흡하며 펼쳐지는 1부와 자리에 착석해 무대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2부로 구성됐다.

넓은 야외 공간 전체를 무대로 삼아 배우들이 올라탄 이동식 구조물들이 관객들 사이사이를 누볐다.

너무 멀리서 보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도 잠시. 바로 옆, 등 뒤에서 불쑥 불쑥 나오는 배우들 덕분에 공연 속에 온전히 빠져들 수 있었다.

아울러 1시간 가량 동안 무대 한 쪽에서 아름다운 첼로 선율을 들려준 박건우 첼리스트의 연주 또한 극과 어우러져 인상 깊었다.

연극은 옛 전남도청 벽을 하얗게 칠하던 노인 김영식의 기억을 따라 펼쳐진다.

칠장이 영식과 도청직원 신입 명심 사이에서 태어난 혁이. 칠장이 아버지를 닮아 혁이는 항상 벽에다 그림을 그렸다.

세 가족의 행복한 기억, 그 시절 전남도청 사람들의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초반 극 분위기를 이어갔다.

성장한 청년 혁이와 어린 시절의 혁이가 번갈아 등장하며 이야기는 시·공간을 넘나든다.

관람하는 내내 도청을 흰색으로 깨끗하게 칠해야 하는 칠장이 아버지와 도청에 낙서를 하는 아들의 대립 또한 돋보였다.

극 중 청년 혁이는 말한다. “지워서는 안 되는 게 있는 거야. 아무리 덮어도 난 그릴 거야.”

이윽고 헬기소리와 연막탄 등 특수효과와 함께 5·18 그날의 긴박한 순간이 전해진다.

극의 분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두 개의 커다란 빨간 페인트 롤러가 청년 혁이의 얼굴과 몸을 그대로 칠하고 지나간다. 마치 탱크에 짓밟히는 모습을 연상시키는 듯했다.

바닥에 깔린 천이 출렁이는 파도처럼 물결치며 공연은 마무리된다.

이처럼 오월 광주를 새로운 시선으로 기억하게 하는 이번 작품에 대해 시민들은 호평을 쏟아냈다.

이날 공연을 관람한 이미연(26) 씨는 “무대 가까이에서 배우들과 소통하며 연극을 즐길 수 있어 두 배로 재밌었다”며 “무엇보다 무겁고 슬프기만 한 5·18 공연이 아니라 더욱 기억에 남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한편, ‘시간을 칠하는 사람’은 2018년 ACC 창작스토리 콘텐츠개발 프로젝트 ‘광주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스토리 공모사업을 통해 선정된 작품 ‘시간을 짓는 건축가(송재영作)’를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2019년 5·18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 시범공연을 선보인 뒤 4년째 공연을 이어오며 ACC의 대표작품으로 자리매김했다.

/글·사진=최명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