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이 없어도 되는 세계 / 천세진 |
| 2022년 10월 23일(일) 19: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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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한 변화가 있고, 변화상은 AI가 인간이 있었던 자리를 차지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반발이 있을 것 같지만, 러다이트 운동(1811-1817)을 딴 네오러다이트 움직임도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한국의 풍경은 오히려 정반대다. 한국 공장의 자동화율은 전 세계 국가들 중 압도적 1위다. 첨단 기술사회로 가장 빠르게 전환한 나라라는 평가를 내려도 될 것 같다.
사회학·경제학 분야 등의 전문가들은 그런 상황에 대해 걱정할 것 없다고, 노동을 AI에게 맡겨놓고 인간은 즐기는 일만 하면 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말을 분명 어디선가 들었다. 20세기 체코가 낳은 가장 위대한 작가라고 평가받는 카렐 차페크(1890-1938)는 1921년 출간한 희곡 『R.U.R(Rossum‘s Universal Robots)』 ―‘로봇’은 바로 이 작품에서 유래했다. 체코어 로보타(robota)에서 따온 것으로 robota는 중노동, 부역노동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에서 도민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하고 있다.
“10년 안에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들이 밀과 의복, 그 밖의 모든 것들을 너무 많이 생산해서, 그런 재화들은 더 이상 가치가 없어질 겁니다. 모든 사람들이 각자가 원하는 만큼 가질 수 있게 될 겁니다. 더 이상 가난은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맞습니다. 인류는 일자리를 잃겠죠. 그러나 그때가 되면 더 이상 해야 할 일 자체가 없을 겁니다. 모든 일은 살아 있는 기계들이 할 테니 말입니다. 사람들은 즐기고 싶은 일만 하면 됩니다. 인류는 자아실현을 위해서만 살게 되는 거죠.”
100년 전에 『R.U.R』속 기술지상주의자 도민이 했던 이야기를 현재의 전문가들이 쏟아 놓고 있다. 카렐은 기술사회가 가져오는 장밋빛 미래를 보여주기 위해 작품을 쓴 것이 아니라, 로봇과 AI가 전면에 나서며 만들어내는 첨단기술사회가 인간을 멸망시킬지도 모른다는 점을 경고하기 위해 썼다. AI가 만드는 현대문명의 모습이 대단한 발전상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이미 100년 전에 예상한 수순이었다.
우리는 총량의 법칙을 자주 잊는다. 모든 세계에는 총량이 있다. 새로운 아이디어나 창조물이 새로운 수요를 만들어낸다고 하지만 반드시 대체가 발생한다. 소비도 총량의 법칙에 따른다. 벌어들이는 것은 일정한데, 무한정 소비를 할 수는 없다. 어떤 형태가 되었든 AI가 들어서면 인간은 그 자리를 내어줄 수밖에 없다. 그건 큰 문제가 아니다. 앳된 노동자가 죽는 참극을 막을 수 있으니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AI가 돈을 벌고 있다는 사실이나, 새로운 시스템이 도입되어 사회 곳곳에 안착하고 있다는 점이 아니다. 단지 노동을 AI 시스템에 맡기는 것이라고 말하겠지만, AI 시스템의 안착은 그 체계가 사회의 주류 작동기제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으로 인간들은 그 작동기제에 따라 생활하게 될 것이다. 그건 결국 인간이 AI 시스템에 어울리는 사유와 행동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그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인간의 인식 체계 자체가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AI 시스템에서 벗어난 사유와 행동 체계로는 생활 자체가 몹시 힘들어질 것이다. 카카오 사태가 그걸 예시적으로 보여주었다. 우리가 의존하는 시스템은 단지 기술적 혜택에 그치지 않는다. 문명과 인간의 본질 자체를 바꿔놓을 수 있다.
AI와 기술지상주의가 사회 시스템을 장악하면 할수록, 인간은 생산하는 존재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고 소비하는 존재로만 여겨질 것이다. 음악, 미술 등 예술 분야에서도 AI의 능력이 입증된 상황에서, 생산하지 못하는 인간이 소비만으로 자신의 존재적 가치에 대해 만족할지는 의문이다. 카렐 차페크가 가상한 세계는 유토피아로 끝나지 않았다. 과연 우리가 AI와 함께, 인간이 없어도 되는 세계가 아니라,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