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사회를 위한 합리적 선택과 민주시민교육 / 김춘식

2022년 11월 28일(월) 19:36

김춘식 동신대학교 에너지경영학과 교수

최근 자동차 접촉사고를 당한 직장동료 A씨의 사고처리 후일담이다. 앞에 주차했던 차량운전자의 황급한 후진으로 인한 충돌이었다. 앞쪽 차량의 범퍼에는 손상이 있었지만 A씨의 차량 앞쪽은 외관상 큰 파손이 없었다. 다친 곳이 없는지에 대한 물음이나 사과도 없었지만, A씨는 앞쪽 차량 운전자인 B씨의 연락처만 받고 헤어졌다. 급한 용무를 마친 A씨는 보험사에 간단히 사고신고를 마친 후 이 사실을 B씨에게 연락했다. 고의성 병원입원이나 높은 보험금 청구가능성에 대한 불안과 걱정 때문인지, B씨는 보험이 아닌 현금으로 사고를 처리할 것을 요청했다. 사고 당일 밤새 몸살 같은 통증이 있었지만 A씨는 다음날 곧장 병원으로 가는 것을 미루고 하루 더 지켜보기로 했다.

증세가 꼭 충돌사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흘째 되던 날 피곤함 외에 특별한 증세를 느끼지 못했던 A씨는 B씨에게 조심운전에 대한 가벼운 조언과 더불어 ‘없는 일’로 할 것을 알렸다.

B씨는 고마움과 더불어 ‘진짜인가?’를 되물었다고 한다. 이에 A씨는 범퍼에 얻은 작은 손상은 차량운행에 지장을 주지 않을 뿐더러, 충돌에 따른 신체의 편타성 손상일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괜찮을 것이라 답했다고 한다.

자신이 유사한 사고를 유발할 경우 타인도 자신처럼 ‘정당’한 관용으로 대할 것이라 믿는 동료의 얘기에 지난 사건들이 떠올랐다.

삼년 전 경미한 접촉사고에 수백만원을 보험으로 배상하고 억울해 하던 아들, 최근 가벼운 접촉사고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웃으며 헤어졌던 피해자가 후일 전치 3주의 병원진단서와 함께 엄청난 보험액을 청구해 분노에 찬 사회적 불신을 표출한 친구, 유사한 경우에 충분한 보험보상을 받아 놓지 않으면 ‘바보’라는 또 다른 동료의 이야기 등이다.

주차 중 오래된 화물차 뒷범퍼를 스친 실수로 수십만원의 현금보상을 강요받았던 개인적 경험도 소회됐다. 이내 상대방의 실수를 기회로 한 몫을 챙기려는 ‘바보’들이 많은 우리 사회의 불신구조에 긴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저서 <불공정사회>에서 현재의 한국 사회를 ‘초저신뢰사회’로 진단한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한국인들은 가족 단위의 소규모 집단만 믿고, 자기 이익과 권리는 챙기지만 사회적 책임의식은 없으며, 구성원 모두가 서로를 딛고 일어서야 할 경쟁 상대라고만 판단한다”고 비판했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학 교수도 한국 사회에는 “‘아는 인연’들에 대한 높은 신뢰도에 비해 ‘생판 모르는 타인들에 대한 신뢰도’가 매우 낮다”는 것을 꼬집기도 했다. 잘 아는 사람에게는 매우 관대하지만, 비록 같은 지역 내에서도 모르는 사람(타인)에게는 배타적 불신이 팽배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 차량 접촉사고와 같이 길거리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신뢰할 만한 인연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한 국가의 경쟁력의 중요한 항목 중 하나인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는 신뢰이다. 불신사회에서는 개인적·사회적 에너지의 소모를 감수해야 하며, 그 대가도 치러야 한다. 체포된 두 범인이 모두 범죄를 부인하면 무죄 방면될 수 있는 상황이지만, 상대방이 배신할 경우에는 자신에게 커다란 피해가 오게 되므로 오히려 상대방을 밀고하는 전략을 택함으로써 둘 다 무거운 처벌을 받게 되는 선택을 하게 된다는 ‘죄수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가 그 사례이다. 하지만 신뢰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행위자가 자신의 기대나 이해에 맞도록 행동할 것이라는 주관적이고 긍정적인 기대에 근거해 상대방으로부터의 ‘배신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의지’를 말한다. 즉, 신뢰는 합리적 선택의 문제와 연관돼 있는 것이다. 상대방이 배신하지 않으리라는 신뢰는 감시와 통제와 같은 사회적 비용의 손실도 줄이고, 나아가 사회적 관계에서 협력을 촉진하기 때문이다.

합리적으로 선택된 신뢰는 곧 민주시민성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다. 때문에 조기 학교교육과정에서부터 각 개인의 인격 속에 있는 양심(사적신뢰)을 공동의 양심(공적신뢰), 즉 사회적 양심(인격의 사회화)으로의 전환을 도와주는 민주시민교육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교통사고가 발생하면 차량파손 유무나 피해와 가해를 다투기 전에 먼저 사람이 다쳤는지를 살피고 묻자. 신뢰하는 마음은 근본적으로 사람이 먼저라는 생각과 행동에서 탄생하며, 품격 있는 교육은 사람에 대한 신뢰를 매 순간 경험해 가는 과정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