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희구 박사 漢詩 향기품은 번안시조(480)

처음 떨어진 매화 송이에 꿈만은 더욱 맑구나

2022년 11월 29일(화) 18:53
冬夜(동야) / 반아당 박죽서
눈 빛 환한 하늘에 기러기 비껴날고
떨어진 매화 송이 꿈이 더욱 밝은데
북풍은 처마 맴돌고 대나무 소리 내네.
雪意虛明遠雁橫 梅花初落夢逾淸
설의허명원안횡 매화초락몽유청
北風意夜茅簷外 數樹寒篁作雨聲
북풍의야모첨외 수수한황작우성

조선의 제도와 현실이 그렇듯이 여성 인격권은 거의 없었다. 사대부의 여성의 권리는 그나마 존중되지만 서인여권은 그렇지 못했다. 일부다처제를 두면서 차별된 여권은 땅에 떨어졌다. 여성들이 긴긴 밤을 혼자 지새우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게다. 동짓달 긴긴 밤의 한 허리를 베어내겠다는 시상들이 이를 반증하지나 않을까. ‘북풍은 밤 세워 초막 처마 끝을 맴돌고 있는데, 찬 대나무 몇 그루가 빗소리를 낸다’면서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처음 떨어진 매화 송이에 꿈만은 더욱 맑구나’(冬夜)로 제목을 붙여 본 칠언절구다.

작가는 박죽서(朴竹西:1817-1851)로 조선 후기의 여류시인이다. 서기보의 재종 형인 서돈보의 ‘죽서집’ 서(序)에 의하면, 죽서는 어려서부터 영오해 아버지가 강습하시는 것을 곁에서 들은 대로 암송하여 빠뜨림이 없었다 한다. 뒤에 자라서는 책을 좋아했다고 전하고 있는 시인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눈 빛 환한 먼 하늘에 기러기 떼 비껴서 날고 / 처음 떨어진 매화 송이에 꿈만은 더욱 맑구나 // 북풍은 밤을 세워 초막 처마 끝을 맴돌고 있는데 / 찬 대나무 몇 그루가 빗소리를 저리 내누나’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겨울밤은 길기도 해라’로 번역된다. ‘추야장 긴긴 밤을 내 어찌 보낼거나?’라는 가곡이 입언저리를 오르내리더니만, 이와 같은 심회들이 시지(詩紙)를 가득 채우던 시문 속을 가득 채워 주고 있다. 그만큼 기나긴 겨울밤은 차마 혼자 보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시인도 이런 밤을 보내기를 안타까워하면서 자기의 심회를 쏟아내고 있어 보인다.

시인은 밤잠을 설치고 있는 밤에 달은 휘영청 밝고 기러기 떼가 날아가는 장면 속에서 속 비어있는 시주머니를 매만지고 있다. 눈 빛 환한 먼 하늘에 기러기 떼가 비껴서 멀리 날고, 처음 떨어진 매화 송이에 꿈이 더욱 맑다고 했다. 소박한 긴긴 밤을 시상의 종이 위에 채워가는 심정을 십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화자는 북풍이 그칠 줄을 모르고 창문을 치고 있는데, 그나마 빗소리까지도 여인의 마음을 포근하게 적시고 있다는 시상의 카드를 꺼내들고 있다. 북풍은 밤 세워 초막 처마 끝을 맴도는데, 찬 대나무 몇 그루가 빗소리를 낸다고 했다. 암만해도 동짓달 기나긴 밤을 지새우기는 어려웠던 시상은 긴 밤의 소묘를 잘 그려내고 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한자와 어구
雪: 눈의 뜻. 意虛明: 허명함의 뜻. 遠雁橫: 멀리 기러기 떼가 비켜서 날다. 梅花: 매화. 初落: (매화가)처음으로 떨어지다. 夢逾淸: 꿈만은 더욱 맑다. // 北風: 북풍. 意夜: 밤을 새우다. 茅簷外: 초가집의 처마 끝. 數樹: 몇 그루쯤이나. 寒篁: 찬 대나무. 作雨聲: 빗소리를 짓다. 빗소리를 내다. <시조시인·문학평론가(사)한국한문교육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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