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리 어답터와 불안의 사회 / 천세진 |
| 2022년 12월 11일(일) 19: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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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이든 시스템이든 새로운 것을 빠르게 받아들이는 것은 그 사회가 진취적이고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절대적으로 꼭 그런 것은 아니다―. 경제적 발전이 시급했던 한국에서는 실험적 수용이 반세기 이상 사회문화적 반발이 속도를 크게 방해하지 않는 상황에서 진행되었다. 따라서 한국은 ‘실험 사회’로도 부를 수 있는데, 대부분의 한국인은 그 사실을 자랑으로 여기는 것 같다.
‘변화’는 한국에서 가장 신성시 되는 단어이고, ‘변화’와 함께 추앙되는 단어는 경쟁 속에서 승리자로 만들어줄 ‘자기계발’이다. 자기계발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을 의미한다. ‘안정’은 죄악시 되는 단어다. ‘안정’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정도가 아니라 퇴보를 의미한다. 한곳에, 하나의 상태에 머무르며 서서히 천이(遷移)를 꿈꾸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도태로 여겨진다.
모든 세대에게 급속한 천이가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믿는 때문인지, 노년세대가 손녀에게 앱을 가르쳐주는 광고까지 등장했다. 놀랍다. 노년세대가 청소년들보다 얼리 어답터가 되어야 한다니! 광고처럼은 아니지만 실상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이제 노년은 키오스크에 빠르게 적응해야한다. 다른 대안이 없다. 하나의 기술이 등장하면 이전의 모든 기술을 무용화해버리는 것이 이 나라가 자부심을 갖는 풍습이기 때문이다.
얼리 어답터 사회에서는 자신이 이제 막 터득한 생존기술을 곧 부정해야 한다. 그 기술에 오래 머무르는 것이 불가능하다. 현재의 기술에도 사회적 상태에도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므로 안정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누구의 목소리인가? 자신의 내면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라고 여기겠지만 그렇지 않다. 내면의 목소리라면, 기업의 목소리에 답하는 방식의 자기계발이 이루어지고 있는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
얼리 어답터 사회에서는 불안이 끊임없이 찾아든다. 변화는 인류의 삶의 근간을 끊임없이 흔들었다. 그때마다 어느 계층이나 세대가 불안 속으로 내몰렸다. 한국은 수용 속도가 너무 빨라서 모든 세대, 모든 계층을 불안하게 만드는 사회로 바뀌었다.
불안은 다른 사회적 문제로까지 파급된다. 한국이 260조원을 쏟았지만 지난 3분기 합계출산율이 0.79명이었다고 CNN이 보도했다. 몇백만원 지원해주는 방식은 일차원적이라고 논평했다. 근본적인 이유가 뭘까? 불안하기 때문이다. 동물들은 주변 환경이 새끼를 낳아 기르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느끼거나 불안을 느끼면 새끼를 낳지 않거나 그 장소를 떠난다. 인간의 반응도 동물들의 반응과 전혀 다르지 않다.
폴 비릴리오(1932-2018)은 『속도와 정치』에서 “최대한의 도달 속도를 지닌 대중들에게만 안전이 찾아올 것”이라고 쓴 동시에 “진보를 파괴한 것은 질주학적 진보의 본성인 속도”라고 썼다. 속도는 ‘안전’을 주지만, 속도에만 집착할 경우, 진보라고 믿은 것이 정작 진보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광적인 질주를 지금 잠시 멈추고, 우리가 추구한 속도가 무엇을 얻게 하고 무엇을 잃게 했는가를 돌아보아야 한다.
속도는 변화를 필연적으로 이끌어낸다. 변화의 최종 목표는 전복이다. 그러므로 변화가 지나치게 신봉되는 사회는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변화도 관성이다. 그 관성에 가속도까지 붙으면 멈추기는 더욱 어렵다. 한국이 지금 그런 형국이다. 빠르고 실험적인 수용은 기술적으로는 긍정적일지 모르겠지만, 모든 영역에 긍정적인 작용을 한다고는 볼 수 없다.
시차를 두고 태어난 기술이라도 얼마든지 공시적일 수 있다. 하나가 태어나면 하나는 사라져야 한다는 것은 강박일지도 모른다. 한국은 반세기 넘게 기술적 향수를 허용하지 않았다. 레트로(retro, 복고풍) 열풍이 불고 있다. 단순하고 표피적인 스타일의 변주가 아니길 바란다. 향수의 시공(時空)을 잃은 것에 대한 깊은 각성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