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막히는 풍경, 숨 멎게 하는 풍경 / 박남기
2023년 02월 02일(목) 19:37
박남기 광주교육대학교 교수
미국 동부지역 출장을 다닐 때면 너무 멀다는 생각이 들곤 했는데 아르헨티나를 방문하고 나서는 미국이 참으로 가깝게 느껴졌던 기억이 있다. 우루과이와 브라질, 그리고 아르헨티나의 앞바다까지가 대한민국의 대척점 즉, 지구의 정 반대 지역에 있는 나라들이다. 미국 동부까지 가려면 바꿔 타는 시간까지 합쳐 거의 하루가 걸리지만 서부 로스엔젤레스는 11시간 정도면 도착한다. 로스엔젤레스에서 부에노스 아이레스까지 가려면 도중에 한 번 더 바꿔 타게 되는데 비행시간만 해도 14시간이다. 바꿔 타는 시간까지 합하면 미국에서도 다시 하루 가까이를 더 가야 도착하는 먼 곳이다.

아르헨티나에는 1970년대와 80년대에 이민 온 분들이 많다보니, 타임머신을 타고 간 듯 그 시절 따스했던 친구들과 이웃들을 거기에서 만날 수 있다. 오랫동안 계획해왔던 페루 여행 계획을 쿠데타 때문에 취소해야 하는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아르헨티나 친구와 SNS로 소통하던 중 난감한 상황을 이야기했더니, 나머지는 모든 것을 자기가 알아서 할 터이니 공항 도착일과 출발일만 알려달라고 했다. 나중에 더 크게 갚자고 생각하며 그의 말대로 길을 나섰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안데스 산 기슭에 있는 바릴로체까지는 직선거리로 약 1천600킬로이다. 2박3일을 잡고 운전하면 조금 여유 있게 주위를 구경하며 갈 수 있다. 도중에 만나는 팜파스(라빰빠) 대평원에는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직선 도로가 펼쳐진다. 도로 양쪽으로는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해바라기 밭과 콩밭, 그리고 소와 말이 노니는 초원이 펼쳐진다. 해바라기 꽃이 한창이어서 참으로 예뻤다. 비토리오 데시카 감독이 만들고 소피아 로렌이 여주인공으로 나온 1970년 영화 ‘해바라기’가 떠오르는 풍경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목적지까지 갈 길이 멀다고 재촉하는 친구에게 차를 멈춰 달라고 요청해 해바라기 밭으로 들어갔다. 활짝 피어난 해바라기 사이에 나의 환한 미소를 잠시 숨겼다. 현지인들에게는 너무나 지루할 끝없이 이어지는 아스라한 지평선이 여행자에게는 마냥 신기한 풍경이다. 평범한 내 삶의 공간도 누군가에게는 가슴 뛰는 추억의 풍경이 되리라.

며칠을 가도 이어지는 지평선이 서서히 나를 가두는 섬인 양 느껴지기 시작한다. 순간일 때는 가슴 시리게 그리운 모든 것들이 영원이 되면 이처럼 지루해지나 보다. 그 영원 안에서도 매 순간 펼쳐지는 다채로운 작은 순간들을 바라보고 느낄 수 있을 때, 삶은 늘 기쁨으로 가득 할 것이다.

러시아 대학을 방문했을 때가 떠오른다. 필자를 아름다운 곳으로 데려간다며 7시간 이상 대평원을 이동했다. 그때도 중간에 마주친 광대한 해바라기꽃과 메밀꽃 밭을 지나치지 못하고 멈춰 달라고 부탁해 사진을 찍고 구경을 했다. 그 대학 교수들이 이런 건 별게 아니고 곧 엄청난 풍경을 마주칠 것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긴 시간을 달려 그들이 자랑스럽게 보여주고자 했던 알타이산맥의 계곡에 도착했다. 소나무를 비롯한 많은 나무가 우거지고 계곡에 물도 흐르는 거대한 산을 보며 그곳 교수들은 감탄사를 쏟아냈다. 그래서 내가 한 마디 싸한 이야기를 했다. 우리 집 뒷산만 가도 이런 모습이라고. 나중에 우리 대학에서 6개월간 연구년을 보냈던 교수도 돌아갈 때쯤에는 산이 그저 그런 모습으로 느껴졌을까 아니면 돌아가기 싫었을까?

너무나 유명한 프랑스의 몽마르뜨 언덕에 갔을 때에도 내려다 보이는 풍광이 기대와는 달리 평이해 실망한 적이 있다. 물론 그곳이 자연풍광으로 유명한 곳은 아니지만, 서초동 몽마르뜨공원 높이도 되지 않는 그곳에는 현지인과 세계에서 몰려든 관광객으로 가득했다. 평야에 사는 그들에게 그 자그마한 높이의 언덕은 멀리까지 조망할 수 있는 신비한 곳이었으리라.

산이라고는 보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산은 아주 대단한 풍경이고, 앞산 뒷산 간짓대 걸쳐지는 곳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는 그 산들을 모두 지워버린 광활한 평야가 오히려 숨을 멎게 하는 풍광이다. 그들에게 거대한 산은 아늑한 어머니의 품이고, 나에게 거대한 산은 때로는 숨 막히고 답답한 넘어가야 할 힘든 고갯마루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니 산에 깃들어 살고 싶어 산 밑의 거처를 다른 곳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다. 산기슭에서 태어났으나 평생을 광활한 초원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민 1세들도 어쩌면 꿈속에서는 날마다 고향 뒷동산에서 뛰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이 들수록 한국이 그리워진다는 구순을 바라보는 한국학교 전 이사장님의 말씀이 귓가를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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