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라풀 호수(Taful Lake)의 추억’ / 박남기

2023년 03월 02일(목) 19:48

박남기 광주교대 前 총장

포장이 된 40번 도로를 벗어나면 비포장의 험난한 산길이 펼쳐진다. 아르헨티나 대부분 도로는 왕복 2차로이다. 무리한 추월을 하다가 사고가 난 지점인지 길가 곳곳에 작은 추모공간이 만들어져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비포장도로에서는 펑크를 막기 위해 타이어의 공기를 조금 빼야 한다며 친구는 준비해간 압력계를 활용해 타이어 압력을 줄였다. 앞차와 반대편 차들이 일으키는 먼지로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먼지를 뒤집어 쓰며 요동치는 산길을 30여 분 가다보니 어린 시절의 비포장 도로와 먼지로 가득한 길가 나무들 모습이 살아서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다.

뭐 볼 것이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험한 길을 운전하며 가는 것일까라고 생각했더니, 갑자기 펼쳐진 태곳적 풍경에 숨이 멎는 듯하다. 만년설로 덮인 산들 사이로 수평선이 보이는 듯한 거대한 호수가 펼쳐져 있다. 경치가 빼어난데도 부부 한쌍만 멀찌감치에서 놀고 있는 호숫가를 운좋게 발견했다. 준비해온 수영복을 입고 친구와 함께 빙하 호수에 뛰어들었다. 잠수를 하니 태고적부터의 시간이 나와 하나가 된다. 안개가 걷히듯이 갑자기 머리가, 시야가 환해진다. 식탁과 의자를 펼쳐 놓으니 한편의 그림이다. 호숫가로의 소풍 기분을 만끽하며 간단한 점심을 먹었다. 한번 더 수영을 한 후, 다시는 보지 못할 아쉬운 작별을 했다.

역시 여행은 온몸으로 직접 느끼는 것이 최고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걷고, 만져보고, 맛보고, 현지인과 대화도 나누며 여행지의 새로운 기운을 가슴 깊이 들이킬 때 여행의 참 맛을 느낄 수 있다. 차로 이동하며 눈으로만 보면 자칫 동영상이나 가상현실로 하는 여행과 비슷해지고 만다. 빙하호수에서의 수영은 생의 마지막 날에도 떠올릴만한 최고의 순간이었다. 정반대의 경험도 있다. 동남아 여행을 하자는 동료들의 제안에 승낙을 했는데, 집사람이 내 일정표를 보더니 몇 해 전에 다녀온 곳과 동일하다며 과거 일정표를 보여주었다. 다녀온 곳이지만 나는 기억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경험을 듣던 지리전공 교수가 새로운 세상과 만나는 활동을 관광, 여행, 답사로 구분해 주었다. 잘 짜여진 계획에 따라 안내자를 따라다니며 귀로 듣고 눈으로 구경하는 것은 관광이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채 차 안에서 자다가 내리라면 내려서 사진찍고 돌아오는 관광을 할 경우에는 다녀온 곳도 기억 못하는 나같은 사람이 되고 만다. 어느 지인이 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패키지 여행 전에 여행사가 제공한 여행지를 인터넷으로 검색하여 사진과 동영상을 보고, 설명도 읽으며 준비를 했단다. 실제 여행을 가서 가이드 안내를 받으며 사진과 동영상으로 보았던 것과 똑같이 생긴 풍경, 예술품 등을 구경하다 보니 굳이 여행온 이유가 뭔가 하는 생각이 들더란다.

계획에 여백이 많이 들어있고, 예상치 못한 공간과 사람 그리고 사건을 마주하기도 하고, 온몸으로 새로움을 만끽할 수 있다면 그것은 여행이다. 단체 관광을 여행처럼 활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여행 욕구 충족을 위해 시간을 맞추지 못하면 타인에게 민폐가 되니 조심해야 한다. 여행 욕구가 강한 사람이라면 프로그램 중에 하루 혹은 이틀의 자유시간이 포함되어 있는 그러한 관광상품을 택하는 것이 나을 듯 하다. 아니면 처음부터 배낭여행 프로그램을 택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사전에 충분한 공부를 한 후, 공부했던 현장을 찾아 몸과 마음으로 느끼고 체험하며 삶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은 답사다. 몇 달간 특정 주제 혹은 지역을 함께 공부한 후에, 수강생들과 강사가 함께 답사를 가는 평생교육원 프로그램이 인기라고 한다. 바쁜 중에도 여유를 만들어 답사 프로그램에 가입해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꼭 해외가 아니더라도, 주말에는 여행가방 하나 끌고 여행을 떠나보자. 아니면 퇴근길이라도 여행길이 되게 해보자. 평소 타던 버스가 아닌 다른 버스를 타고, 평소 다니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돌아서 문득 마주친 커피숍에서 새로운 나를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