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명권과 혼성의 동물 / 천세진 |
| 2023년 03월 12일(일) 19: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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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 제르맹은 『밤의 책』에서 이름 짓는 것에 대해 이렇게 썼다. “신은 세상과 만물을 창조했지만 아무것에도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 신은 이름 붙이지 않은 이 무수한 것들을 인간의 재량에 맡겼고, 인간은 (…) 즉시 주변의 모든 것에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가 지어내는 말 하나하나가 사물에 새로운 외양과 굴곡을 부여했다. 이름은 사물들에 그와 꼭 닮은 진흙의 형상들로 음영을 넣었고 그 형상들 속에서는 벌써부터 닮음과 어렴풋한 차이의 장치가 각인되었다.” 이름은 그렇게 짓는 것이었지만, 식민과 세계화가 그걸 망쳤다.
무수한 사물과 현상에 이름을 짓는 권리, 작명권(作名權)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의 땅에서 오랫동안 뿌리를 내리고 삶을 이어간 사람들의 권리가 아니다. 그 권리를 강탈하고, 팔아치우고, 스스로 헌납한 것이 식민의 역사와 자본주의 역사를 가득 채우고 있다.
세계화 이전에는 이름을 지을 수 있는 각각의 언어 공동체들의 영역이 지켜졌고, 작명권은 오롯이 언어공동체에게 있었다. 식민과 세계화는 무자비한 악마처럼 작명권을 앗아갔다. 이미 이름을 가진 것들도 이전의 이름을 잃고 강자들이 붙여준 이름으로 바뀌었다.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의 숱한 지역들과 무수한 사물들, 특별한 현상들이 스페인어, 영어 등의 외국식 이름을 갖게 되었다. 아프리카 바다의 신기루들은 멀리 떨어진 아서왕의 배다른 누이인 마녀 모르가나의 이름을 딴 ‘파타 모르가나’로 불린다.
아직 이름을 가지 못한 사물들이 발견되거나, 새로운 문명적 사물과 문화현상이 탄생해도 최종적으로는 강자가 명명한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점령자, 지배자의 작명권이 이름에만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름은 사물을 지칭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물의 작동과 세계의 운행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름을 짓는 것은 사회 체계 자체를 바꾸는 일이 되기도 한다.
약자들에게는 작명권이 없다. 강자들만이 작명권을 갖는다. 이름을 누가 짓고, 어떻게 지어지고, 어떤 이름들이 지어지는지를 찾아내면 그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를 파악할 수 있다. 사물에 대한 인식과 사회를 운용하는 체계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의 요소요소가 지배자들에 의해 바뀌어왔다. 20세기 전반에는 일본에 의해 이름이 부여되었고, 해방 이후에는 미국에 의해 이름이 부여되었다. 현재의 주소명은 편리 여부를 떠나서 미국식 체계라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예능 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하는 게임이 하나 있다. 외국어를 사용하지 않고 대화를 하는 게임인데, 끝까지 성공하는 경우는 드물고, 출연자들은 외국어를 사용하지 않고 한국어로만 대화를 나누는 일을 고통스러워한다. 현재 한국인들은 한국어와 영어를 혼합하여 문장을 만들어낸다. 신기한 것은 그렇게 만들어낸 문장이 어려움 없이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이다. 아이돌 그룹의 이름은 미국식으로 바뀐 지 오래되었다. 언어를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사회구성원들의 사유와 인식 체계가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가를 그대로 드러내주는 중요한 증거물이다.
마리즈 콩데는 『세구 흙의 장벽』에서 언어 혼용의 비극을 보여주었다. “에우카리스투스 자신도 포르투갈어와 어머니의 언어인 요루바, 푸라 벨이 칼리지의 교육용 언어인 영어를 했고, 그 모든 걸 뒤섞으면 이 해안 지역의 링구아 프랑카인 피진이 만들어졌다. 그가 보기에 바벨탑이 생각날 정도의 이러한 언어의 혼용은 자신의 정체성의 이미지와 닮았다. 그 자신은 누구인가? 스스로를 정의할 수 없는 혼성의 동물.”지금 우리가 그렇지 않은가?
모든 단어는 품사와 상관없이 작명이다. 우리의 언어와 문장에 이방에서 흘러온 것들이 가득한 것은, 우리의 사유와 문화적 호명(呼名)이 오롯한 권리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작명권을 지키며 사유하고 문화를 만들어내야만 진정으로 식민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