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싼 마르틴 안데스가 전하는 말 / 박남기 |
| 2023년 04월 13일(목) 19:45 |
|
여기는 이제 긴 하루를 마치고 해가 서산을 향하는 저녁 7시인데, 내가 온 곳은 해가 곧 솟아오르는 아침 7시이다. 구순 노모께서 수화기 너머로 아침밥 잘 챙겨 먹으라는 인사를 전해오신다. 줌으로 온라인 국제회의를 할 때면 굿모닝, 굿에프터눈, 굿이브닝이라는 인사를 동시에 건넨다. 자정이 가까워 졸린 눈을 겨우 뜨고 회의를 하는데 미국 동부 사람들은 점심시간을 바라보고 있고, 서부 사람들은 이제 아침을 시작하고 있으며, 영국에서는 오후 세시를 넘기며 서서히 하루일과를 마감할 준비를 하고 있다. 자주 하다 보니 이젠 익숙해져서 내가 있는 곳이 저녁이더라도 그들은 아침일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나는 머지않은 퇴임을 앞두고 있는데, 새 학기 우리 과 신임교수는 설레는 첫 강의를 시작할 것이다. 내게 남겨진 시간은 모래시계 안의 남겨진 마지막 한 줌의 모래처럼 흐름이 눈에 보이지만, 새로 시작하는 젊은 신임교수에게 주어진 시간은 무한대인 양 느껴지리라. 같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함께 숨 쉬고 있더라도 그와 나는 서로 다른 시공을 살아가는 것이다. 머지않아 내 자리에 서게 될 것임을 그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마음으로 깨닫는 데에는 또다른 30년이 걸릴 것이다.
그 누군가는 긴 생을 마치고 우주로 돌아가고 있는 이 순간, 누군가는 모선에서 방금 하선하여 큰 함성으로 지구별 여행을 시작한다. 상가는 살아생전 한 번도 뵙지 못한 분과 지상 여정의 끝자락에서 연이 닿아 마주하는 자리이다. 첫 번째 큰절을 올리며 그분이 좋은 곳으로 가시길, 두 번째 큰절을 올리며 지상에 남아 있는 우리에게 희망이 되어주시길 기도드린다. 매일 매 순간 우주정거장에서는 공항보다 더 북적이는 속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사연을 안고 우주로 돌아가고 지상에 도착한다.
누군가는 사랑 고백을 받고서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순간, 또 다른 누군가는 이별 통보를 받고서 고통에 몸부림친다. 사랑의 환희에 찬 그에게 온 세상은 사랑이고 기쁨이다. 이별의 고통에 숨쉬기마저 어려운 그에게 온 세상은 어둠이고 절망이다. 그 기쁨과 고통은 잠시 후면 지나갈 순간이 아니라 영원할 것처럼 느껴진다. 사랑과 이별도 아침과 저녁처럼 나를 잠시 지나가는 상황일 뿐이다.
지구에서는 24시간이, 사계절이, 탄생과 소멸이, 사랑과 이별이 쉼 없이 이어지고 있다. 내가 머물고 있는 이곳, 지금 이 순간이 저녁일 뿐이다. 또 다른 나는 하루 24시간의 어느 순간을 살아가고 있다. 내가 머무는 이곳이 한 여름일 뿐, 또 다른 나는 봄을, 가을을, 그리고 겨울을 살아가고 있다. 내가 처한 현재의 상황이 떠날 때가 된 것일 뿐, 또 다른 나는 시작을 준비하고 있다. 내가 떠나면 또 다른 내가 내 연구실에 앉아 세상의 모든 고민을 혼자서 짊어진 양 고뇌하며 밤을 밝히리라.
온 세상 사람이 내가 마주한 순간을 살고 있지는 않음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는데, 안데스 기슭의 빙하호수와 하나가 되니, 만년의 시간을 간직한 호수의 깨달음이 고스란히 온몸을 통해 가슴 깊이 전해진다. 나는 우연히 잠시 이곳에 연이 닿아 내 주위 사람들과 사랑하며 머물다가 떠나는 존재일 뿐, 내가 떠나더라도 또 다른 내가 나의 기억을 무의식 속에 간직하며 아름답게 살아갈 것이다. 시린 호수에 몸을 담그니 세례를 받은 양 싼 마르틴 안데스의 깊은 음성이 나와 하나가 된다.
2023년 1월17일 싼 마르틴 안데스에서
2023년 4월3일 고쳐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