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여는 詩]오늘의 보폭 / 박복영

2023년 05월 21일(일) 19:36

박복영

봄비 그치니 도착이 숨쉬기 시작한다
저 봉오리 튼 꽃은 뒤축 터진 신발 같아 꽃잎을 맞추면 걸어온 길이 보였다
햇살에 오늘의 갈피가 말라가는 동안
흔들린 자리마다 빗방울은 스몄을 것이나 아직 지지 못한 꽃잎들은 숨결을 채집하며 일어섰을 것이다
거미줄에 맺힌 빗방울처럼
소신공양, 어제의 꽃들은 모두 졌다
왼쪽 어깨로 조금 더 기울어졌고 잘게 쪼개진 개울물 소리는 다시 견딜만하다
하루는 걸어온 보폭만큼 가벼워졌다
나는 오늘의 보폭이다
(시집 ‘아무도 없는 바깥’, 달을쏘다, 2023.)

[시의 눈]

봄비는 질경이밭으로 날 당깁니다. 흙길을 피하란 신호인 듯합니다. 비탈의 노간주나무엔 거미줄로 꿰어진 빗방울이 또르르 집니다. 아카시아꽃 속으로 방울은 안약처럼 가만 점액됩니다. 개울물은 막내의 피아노 손가락처럼 운율 한겹을 더 얹을 때입니다. 보폭을 키울까요, 바람에게 묻습니다. 사실 얼마 전 즐겨 오르던 운암산에 불이 났습니다. 글 쓰다가 막히면 보폭 크게 걷던 산이었지요. 막막했다니까요. 한데, 한 달 후인가요. 불길이 지난 틈새 몇 차례 빗물에 젖었나 싶었지요. 숯덩이밭에 아카시아 순, 싸리나무 싹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도토리 연두싹도, 애기발톱 같은 매발톱 풀도 자잘한 보폭으로 나를 따라왔지요. 비 그치자 난 발소리의 볼륨부터 줄입니다. 박복영 시인은 군산에서 나, 1997년 월간문학 시, 2014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조, 2015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로 등단해 시집 ‘낙타와 밥그릇’(2015) 등을 펴냈습니다. 그는 화자와 대상의 내면세계를 조응시키며 그 안의 섬세한 무의식을 점묘하듯 형상화하는 시인입니다. <노창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