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실종, 미국을 반면교사로 삼자 / 오수열
2023년 06월 04일(일) 19:39
오수열 조선대 명예교수·광주유학대학장
외신은 세계의 최강대국이자 부자나라인 미국이 가까스레 정부의 채무상환 불가능(디폴트)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중국의 위안(元)화가 맹추격하고 있지만 여전히 세계의 기축통화인 달러($)의 발권국가인 미국이 디폴트 상태에 빠지게 될 경우 세계경제에 미칠 악영향과 혼란을 생각할 때 퍽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평생을 정치학을 공부하고 가르쳐온 필자에게는 이러한 디폴트의 해결이 주는 경제적 영향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바이든 대통령과 케빈 매카시 하원의장 간의 끊임없는 대화와 타협에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정부의 부채한도’는 미국정부가 빌릴 수 있는 돈의 규모를 제한하기 위해 의회가 설정한 것으로 현재는 의회의 동의 없이는 약 31조4천억 달러를 초과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엄격한 3권분립제를 채택하면서도 ‘의회주의’를 표방하여 행정부에 대한 의회의 견제를 기본으로 하는 미국식 정치제도의 산물인 셈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행정부와 의회간의 대립은 미국의 정치에서는 종종 있는 일이고, 특히 대통령이 속한 정당이 상원과 하원 모두에서 다수당의 지위를 갖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자주 발생하는 일이다. 지금 바이든 행정부의 경우 상원에서는 다수당이지만, 하원은 야당인 공화당이 다수당인 까닭에 야당의 협력 없이는 원활한 국정운영이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한편 미국과 달리 단원제(單院制)를 채택하고 있고, 국회에서 야당인 ‘더불어 민주당’이 압도적인 의석을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경우 대통령과 야당간의 타협과 협조는 더욱 절실한 과제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전개되고 있는 일련의 상황은 국민들에게 ‘대화와 타협’이라는 정치의 본질을 의심케 할 뿐만 아니라 정치 자체는 실종되고, 마치 마주보고 달리는 두 대의 기관차가 고속으로 질주하는 것 같은 불안감을 안겨주고 있다. 우선 양곡법 파동이 그것이다. 야당이 일방적으로 통과시킬 경우 대통령의 재의 요구권(거부권) 행사가 불 보듯 뻔한 데에도 야당은 법안의 내용을 두고 행정부 및 여당과 협상을 전개하는 대신 법안통과를 강행하였고, 대통령은 기다렸다는 듯이 거부권을 행사한 것이다.

간호법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 법의 경우 직접적 당사자인 간호사와 의사뿐만 아니라 치과의사, 한의사, 간호조무사 등 다양한 직역군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는 까닭에 이들의 의견과 입장은 어떠한지를 경청해야 할 뿐만 아니라 국민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등을 두고 좀 더 깊은 논의와 대화가 전개되어야 할 사안이다. 이 역시 다수의석을 가진 야당의 일방적 강행으로 법안은 통과되었고, 예정된 수순인 것처럼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이 과정에서 대통령과 야당대표 간에 어떠한 대화가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고, 여야 원내대표 간에도 진지한 협상이 있었다는 뉴스를 접하지 못하였다. 말 그대로 정치의 실종인 것이다.

여기에서 볼 때 법안통과를 강행한 야당과 이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한 대통령 모두 보다 합리적인 법률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라기보다는 자기들의 지지층만을 의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하였다.

반면에 바이든 대통령과 야당인 공화당의 수장인 케빈 매카시 하원의장은 디폴트상황을 막기 위해 수시로 전화하고, 타협을 시도하였다. 그 결과 하원이 정부의 채무상환 한도를 늘려주는 대신 앞으로 2년간 정부의 재정지출을 제한하기로 합의하였고, 구체적으로 바이든 행정부의 핵심공약인 ‘식량보조금프로그램’ 등 연방정부의 복지지출을 공화당 요구대로 축소하기로 합의 하였다. 문자 그대로 ‘대화’와 ‘타협’의 정치인 것이다.

언론보도에 의하면, 야당인 ‘더불어 민주당’은 또다시 방송통신법 개정안을 강행처리할 것이라고 한다. 만약 정부·여당과 타협 없이 통과되는 경우, 여기에 대해서도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것은 ‘기계적 놀음’이지 정치라고 할 수가 없다. 물론 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야 하며, 동시에 ‘대통령의 재의 요구권’도 헌법에 보장된 권한이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이 적용되고, 권한이 행사 되는데에도 금도(襟度)가 있어야 하고, 상식선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제 총선이 채 1년도 남지 않았다. 현재와 같이 여소야대 현상이 지속될지 여대야소 상황으로 바뀌게 될지 국민들의 판단이 내려질 것이다. 다만 국민들이 어떠한 선택을 하더라도 지금처럼 정치가 실종되어서는 정치안정(政治安定)은 요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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