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지막 감자 / 박남기 |
| 2023년 07월 04일(화) 19: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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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건강이 갑자기 악화되어 집을 떠나게 되니 텃밭에 심긴 작물들이 돌보는 이 없는 애완동물처럼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상추 대는 내 어깨만큼 키가 컸고, 뒤안 텃밭 고구마 순은 모두 죽어 빈밭이 됐다. 옥수수 고추 깨 토마토 가지는 물을 주지 않아 말라가고 있었고, 오이는 우거진 잡초 사이에서 제대로 자라지 못한 채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곧 장마 시작이라고 하여 어머니가 심어 놓은 마지막 감자를 캐러 잠시 틈을 냈다. 어머니가 집을 떠난 후에야 헛약속을 지켰다. 이렇게 마음 먹으면 시간을 낼 수 있는 것을 그간 온갖 핑계를 대며 수확 시기를 잘 맞추지 못할 때가 많았다. 아들이 왔다고 온 얼굴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목청 높여 노래도 한 곡조 뽑으며 같이 캤을 어머니 대신 텃밭 고랑에 호미만 하나 덩그마니 놓여 있다.
작은 텃밭이니 해뜨기 전에 마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아침도 먹지 않은 채 새벽 일찍 출발했다. 그러나 하다보니 해가 솟아 땀 범벅이 되었다. 감자 캐러 가는 날에는 새벽 다섯 시만 조금 넘어도 아직도 안 오고 있느냐는 어머니 전화가 빗발쳤다. 돌아보니 더워지기 전에 마칠 수 있게 배려하는 마음이었다. 앞마당 텃밭에 여섯 고랑, 뒤안 텃밭에 한 고랑이 수확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를 지난 시점이어서 수확이 좀 늦었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벌써 싹이 난 것들, 그리고 썩어가는 것들도 있었다. 마지막 한 달 이상을 그냥 방치하여 밑이 잘 들지 않고 씨알도 작으리라 짐작했는데 생각보다는 많았다. 어머니의 정성이 담긴 마지막 감자이니 형제자매가 모두 나눠 먹자던 형님의 말씀에 부응할 수 있을만큼 충분해 보였다. 그래도 어머니가 보셨으면 올해 감자 농사는 헛짓했다고 하셨을 것이다.
안 하던 일이어서 그런지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벌써 허리가 아프고, 목도 말랐다. 매년 어머니가 수확한 감자와 고구마를 한 상자씩 보내주실 때면 다 먹지도 못하고 버리게 되는데 뭐하러 그리 보내시느냐 투정도 부렸다. 혼자서 캐어 헛간으로 옮기고, 감자 캐낸 밭두렁에는 잡초가 우거지지 않도록 검은 비닐로 덮고, 날아가지 않도록 그 위에 큰 돌과 감자순을 올렸다. 어머니가 계셨더라면 모두를 나눠 박스에 담은 후 서울과 광주에 사는 자식들에게 부쳤을 텐데, 지치고 배도 고파 거기까지는 하지 못했다.
시골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필자는 논밭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할머니께서도 필자의 가냘픈 손목을 잡으며 그 손으로는 농사짓기 어려우니 열심히 공부하라고 늘 말씀하셨다. 대신 어머니께서 평생 부지런히 논밭 일을 하셨다. 자갈 반 흙 반인 마당을 파서 만든 텃밭인데도 얼마나 열심히 가꾸셨는지 작은 돌멩이 하나 없고, 흙은 어머니 가슴처럼 포근했다. 뭐가 그리 바쁘다고 늘 헛약속만 했을까?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고자 하나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 수욕정이풍부지 자욕양이친부대). 어머니가 입원하게 되자, 형님이 올린 <한씨외전(韓氏外傳)>에 나오는 구절이 스친다.
전국 강연을 다닐 때면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까지 함께 모시고 다녔다. 아버지 돌아가신 후에는 어머니만 모시고 다니기도 했다. 사람들이 돌아가신 자기 부모님을 떠올리며 나를 부러워할 때면, 나는 후회가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어머니가 자리에 눕게 되니 모든 것이 후회로 밀려온다. 돌아가실 때 덩실덩실 춤을 춘 어느 효자 이야기를 떠올리며 나도 그리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음을 마지막 감자를 캐며 이제야 깨닫는다. 어머니, 이젠 다 잊고 편히 쉬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