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희구 박사 漢詩 향기품은 번안시조(509) 남은 잠 못 이루고 베개를 얼른 밀치고 일어나서 |
| 2023년 07월 12일(수) 19: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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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明半夜更籌永 秋到深園蟋蟀哀 월명반야경주영 추도심원실솔애
殘夢未成推枕起 頻將紈扇拍窓隈 잔몽미성추침기 빈장환선박창외
한 밤에 달은 밝고 이 한 밤 긴데
동산에 가을 오자 귀뚜라미 슬피 울고
남은 잠 밀쳐 일어나 부채로 창턱 치네.
가을 귀뚜라미라 한다. 구성진 소리가 작지만 큰 가을의 수확에 만족하란 뜻은 아닐지 모르겠다. 마룻장 가까이 다가온 귀뚜라미 무리가 옹알거린 소리는 그리운 임의 목소리로 착각하는 수도 있어 이따금 봉창 문을 열었다, 닫았다 반복하기도 한다네. ‘임이시여! 저예요. 어서 우리만의 한 밤을 즐겁게 보내요’ 가만히 속삭이면서. 한 밤에 달은 밝고 이 밤은 길기만 한데, 동산에 가을 들자 귀뚜라미 소리 구슬프다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남은 잠을 못 이루고 베개를 얼른 밀치고 일어나서(蟋蟀)로 제목을 붙여 본 칠언절구다.
작가는 규창(葵窓) 이건(李健:1614-1662)으로 선조의 손자이자 조선 후기의 문인이다. 1628년(인조 6) 아버지 인성군은 대역 처분을 받아 진도로 귀양을 갔던 것으로 알려진다. 처음에 가족들이 모두 섬으로 따라갔는데, 인성군이 죽은 후 형 이길, 이억 등과 더불어 제주도 정의현으로 유배되는 순환을 겪었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한 밤에달은 밝고 이 밤은 길기만 한데 / 동산에 가을 들자 귀뚜라미 소리 구슬프구나 // 남은 잠을 못 이루고 베개를 밀치고 얼른 일어나서 / 비단 부채 들어 창턱을 자주 치네’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귀뚜라미 소리 들으면서’로 직역해 본다. 가을의 애상(哀想)을 알리는 귀뚜라미 소리는 쓸쓸한 생각이 든다. 희망을 알리는 봄인가 했더니만, 폐장과 움츠림을 알리는 귀뚜라미 소리는 또 한 살을 재촉하고 있기 때문이다. 창고에 곡식이 넉넉한 사람들은 따뜻함을 느끼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벌써부터 걱정부터가 앞장선다. 이것이 우리 선현들의 바라보는 가을의 소묘 한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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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이와 같은 계절적인 밑그림 한 점을 살며시 그려놓고, 물감으로 칠하는 색칠은 바쁘기만 하다는 시통 주머니는 넉넉해 보인다. 한 밤에 달은 밝고 이 밤이 길기만 한데, 동산에 가을이 들자 귀뚜라미 소리 구슬프다고 했다. 구슬픈 가을은 그렇게 선현들의 포근한 가슴을 찾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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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산한 이런 때에 화자는 초저녁에 잠깐 붙였던 잠을 밀어내고 뒤척이는 한 밤이 지루했음을 나타내고 있다. 남은 잠 다 못 이루고 베개를 밀쳐 일어나서, 비단 부채 들어 창턱을 자주 친다고 했다. 마룻장 밑까지 찾아든 귀뚜라미가 방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부채로 막아냈음을 보인다. 시상의 밑그림은 그렇게 넉넉해 보이는 시상이다.
<시조시인·문학평론가(사)한국한문교육연구원 이사장>
※한자와 어구
月明: 달이 밝다. 半夜: 한 밤에. 更: 곧. 지금이. 籌永: 길기만 하다. 秋到: 가을이 이르다. 深園: 깊은 정원. 蟋蟀哀: 귀뚜라미가 슬프게 울다. // 殘夢: 남은 꿈. 未成: 이루지 못하다. 推枕起: 베개 밀치고 일어서다. 頻將: 자주 부치다. 紈扇: 비단 부채. 拍窓隈: 창턱을 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