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정신 호남풍류 / 주홍

2023년 07월 13일(목) 20:13

주홍 치유예술가

“자고능용(慈故能勇), 자애로우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는데, 붓글씨를 써서 족자를 했으니, 언니에게 잘 전해 주시게.”

족자를 펼쳐보니 글에 당당한 힘과 운필의 내공이 느껴졌다.

1980년 5월 광주시민은 민주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용감하게 싸웠다. 그 뜻을 담은 글이 자고능용(慈故能勇)이다. 당시 여고생의 몸으로 항쟁에 참여하고 일기를 남긴 주소연 선생은 나의 친언니다.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5·18기록물에 언니의 일기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의 선물을 준비하셨다는 서예가 예당 고영표 선생은 30여 년 동안 서예와 문인화를 하며 묵묵히 붓을 들었던 무안의 어른이다. ‘호남의 옛 어른들은 붓글씨나 문인화로 마음을 전하는구나.’ 필자는 서예 작품을 보고 예당 선생의 다른 작품들이 궁금했다.

선생의 작업실 문을 열자, 오래된 종이 냄새와 먹향이 묵직하게 코로 스며들었다.

켜켜이 쌓인 한지에 그린 그림들과 글씨들, 벽에 걸린 족자와 두루마리로 말아서 세워둔 서예 작품들로 발 딛기가 어려웠다.

‘이 많은 작업을 언제 하셨을까!’

작가의 작업실은 무의식의 방이다.

90을 바라보는 한 어른의 방에 들어서서 몇 작품을 펼쳐서 보다가 인간의 품위를 지키며 살고자 어려운 시절 몸부림치듯 홀로 찾아다니며 서예를 배우고 문인화를 배워서 한 획 한 획 정성껏 써 내려간 그 세월이 느껴졌다. 많은 작업량에 놀라웠고 아직도 매일 붓글씨를 쓰며 일상에서 풍류와 멋을 즐기는 삶의 태도가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그 무의식의 창고에서 발견한 서예와 문인화들 약 20여 점을 광주정신 메이홀 2층에서 ‘호남풍류’라는 제목으로 전시하기로 했다. 한 분의 어른을 만나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한 사람이 역사라는 결론에 이른다.

예당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서 14살 6·25 전쟁을 겪은 우리 역사상 참혹했던 시대를 살았던 분이다. 6·25 전쟁 중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어린 세 명의 동생과 함께 초근목피로 어려운 시절을 견디며 살았지만, 참으로 인간적이고 품격있는 삶을 살아오셨음을 작품들이 보여주고 있었다. 형편이 어려워서 학교를 그만두게 됐어도 스스로 스승을 찾아 배우며, 더 아름답고 인간다운 삶을 위해 수필과 시를 쓰고 서예와 문인화를 하며 평생 예술활동과 풍류를 즐기셨다. 전형적인 호남인이다.

호남인의 풍류정신에는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해내는 ‘흥’이 내재 돼 있다. 이것은 생에 대한 초긍정의 힘이요, 한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저력이다. ‘약무호남 시무국가’라고 했듯이 국난이 닥칠 때마다 호남인이 공동체를 구할 수 있었던 힘도 역시 더 인간다운 선택을 했던 호남정신과 호남 풍류의 힘이 호남인의 피에 유유히 흐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가 노인이라고 말하는 어르신들은 참혹했던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군부독재의 억압을 견디며 우리 세대에게 민주주의와 평화와 풍요로움과 품격있는 문화를 물려주신 분들이다.

예당 고영표 선생의 작업실에서 그 야만의 시대에 고귀한 인간성을 지킨 힘과 창작 정신을 발견했다. 돈에 모든 것을 팔아버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 귀한 호남인의 멋과 풍류를 지킬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