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마당]명옥헌원림(鳴玉軒苑林) / 수필 - 임인택

2023년 08월 21일(월) 19:41

황홀하다.

마치 수많은 선녀가 부채춤을 추는 것처럼 아름다운 배롱나무 가로수 길을 따라 담양 고서 명옥헌원림(국가명승 제58호)에 간다. 원림(園林)은 인위적인 정원이 아닌 숲은 그대로 두고 정자나 집을 배치한, 자연 경치를 경관 구성 재료의 일부로 빌려온 자연 순응적인 전통 정원 양식을 말함이라 한다.

오래된 배롱나무는 나무껍질이 자줏빛을 띤다고 해 옛 분들은 자미(紫薇)나무라 부르며 정자 주변이나 사랑채에 즐겨 심었다. 자미꽃은 도화꽃과 같이 무릉도원을 상징하는 꽃이기에 봄엔 도화꽃을 여름엔 자미꽃을 보면서 정자에 모여든 벗들과 시를 읊고 학문을 논하고 풍류를 즐기며 무릉도원의 세상을 꿈꿔 왔다.

또한 배롱나무가 그 붉은 꽃을 줄기차게 피운다고 해 ‘충(忠)을 표출하는’ 것으로 생각했는가 하면, 그 매끈한 줄기는 속의 모습을 그대로 밖으로 드러낸 이미지로 받아들여 선비들 스스로의 최고 가치로 삼아온 ‘표리일치(表裏一致)’를 상징하는 것으로도 여겼다. 참으로 본받을 만한 나무로 여긴 것이다.

명옥헌 원림은 인조반정의 공신인 오희도(1583-1623)의 옛 집터로 그의 아들과 후손들이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정자를 짓고, 계곡 위쪽에 작은 연못을, 명옥헌 정자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큰 연못을, 조선시대 정원의 대표적 모양인 방지중도형(方池中島形) 네모난 연못을 파고 못 가운데 작은 섬을 만들어 배롱나무를 심었다. 또 정자와 못의 주변에도 적송과 배롱나무를 심어 큰 꽃밭을 만들었다.

원림 조금 높은 언덕 위 사방이 탁 트인 곳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을 올리고 명옥헌이란 현판을 달았다. 텅 비어 더 고고한 정자는 원림에 시적인 운을 더하고 있다. 명혹헌은 정자(亭)라 이름하지 않고 굳이 집 헌(軒)자를 쓴 이유는 대청에 앉아 정원을 내려다보며 심성을 수양하기 위해 사랑채 같은 개념의 헌(軒)자를 붙였다고 한다.

마루와 지붕을 잇는 기둥이 만들어 낸 공간 속에는 삶의 향기와 문학적 상상력이 넘쳐 이야기는 시가 되고 학문이 되고 자연의 변화에 따라 변주되는 공간의 느낌은 그 자체가 음악이 되었을 것이다. 연못에 푸른 물 고이듯 기둥마다 주련이, 마루 가득 고인 시문은 서까래 밑에 편액으로 걸려있다.

호젓하게 걷다 정자에 걸터앉아 꽃구경한다. 타오르는 장작불 불꽃 같은 빨간 배롱나무 숲. 한낮 가늘게 흐르는 도랑물 소리가 고즈넉한 운치를 더해준다. 붉은색 하나만으로도 세상은 이리도 곱구나. 마치 홍화 물감을 풀어놓은 듯 붉은 배롱나무꽃들이 물 위에 흥건하다. 붉다 못해 처연하다. 이곳에 살았던 황지우 시인은 이를 화엄(華嚴) 연못이라 했다.

연못에 비친 붉은 꽃 그림자와 연못을 덮고 있는 떨어진 꽃잎들이 또 다른 꽃밭을 만들고 있다. 물속도 땅 위도 하늘도 세상은 온통 붉은 꽃 천지다. 명옥헌 정자에 앉으면 누구라도 시 한 편 쓸 것 같다. 참 붉기도 하다. 그냥 붉을 뿐이다.

연못에 고여 드는 도랑물 소리가 낭랑하다. 작은 개울이지만 개울을 타고 연못에 드는 맑은 물소리가 옥을 굴리는 소리 같다 해 우암 송시열은 정원의 이름을 명옥헌(鳴玉軒)이라 짓고 계곡 바위에 새겨 두었다.

뜰 가득 심어진 수십 그루의 배롱나무는 긴 세월 살아오느라 등걸이 다시 등걸이 되고 거기서 뻗어 나온 가지가 또 다른 원줄기처럼 보인다. 아무것도 걸친 것 없는 속(俗)됨을 다 지워낸, 그래 청렴과 무욕을 말해주는 듯한 배롱나무. 공명(功名)을 버린 선비의 마음은 저런 모습일까.

오랜 세월의 흐름을 간직한 연못과 배롱나무 사잇길을 걷다 보면 세상사 시름은 어느새 마음 한구석으로 쑥 물러나 앉는 기분이 든다. 연못에 가지를 드리운 배롱나무가 바람에 하늘거리는 모습을 볼 적마다 나는 이 집의 옛 주인이었던 조선의 선비 오희도와 새 나라를 경영하기 위해 비밀스런 포부를 품고 이곳을 찾은 능양군(인조)을 떠올리며 정자 안쪽에 걸린 삼고(三顧)라는 편액이 주는 의미를 생각한다. 그저 풍경을 바라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대상을 음미하고 깊이 생각하는 ‘반추하는 행위’야 말로 여행의 여운을 길게 하는 참 멋이 아니겠는가.

또 鳴玉軒苑林(명옥헌원림)에서 원림(園林)이라고 하지 않고 원림(苑林)이라고 하는 것은 임금님이 다녀간 곳이란 뜻이 있기 때문이라니 더욱 이곳의 의미는 깊다 하겠다.

<임인택 약력>
▲문학21, 문학춘추 수필 등단(2002)
▲광주문학상, 빛고을문학상 등 수상
▲수필집 : ‘때론 바람이고 싶다’ 외 3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