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동하는 양심, 영화 ‘길 위에 김대중’ / 오주섭 |
| 2023년 12월 28일(목) 19: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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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2월19일 토요일. 출근하기 위해 아침 일찍 시내버스에 올랐다. 시내버스에 탄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아무 말 없이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창밖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하늘도 슬퍼하는 듯 그날따라 야속하게도 겨울비가 하루 종일 내렸다. 하루 전 12월 18일은 제14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날이다. 민주당 김대중 후보가 3당 합당으로 후보가 된 전두환의 민정당 후예 민주자유당 김영삼 후보에게 졌다. 광주시민들은 크게 낙심(落心)했다. 지금도 그날 침울했던 광주를 잊지 못한다.
그리고 1997년 12월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는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됐다. 지금도 그날 환희(歡喜)의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IMF 외환 위기 직후라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사 중 “올 한 해 동안 물가는 오르고, 실업은 늘어날 것입니다. 소득은 떨어지고, 기업의 도산은 속출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땀과 눈물을 요구받고 있습니다.”라는 대목에서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지금도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추스르며 진심으로 국민을 걱정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결국 악의 편
1975년 4월19일 박정희 유신 독재정권에 맞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씨알의 소리 창간 5주년 기념 시국 강연회에서 시민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결국 악의 편, 방관은 최대의 수치, 비굴은 최대의 죄악입니다. 생각하는 국민, 행동하는 국민이어야만 살 수 있습니다.” 당시 만 51세였던 김 전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행동하는 양심’에 대해 언급하며 유신 독재정권에 국민 모두가 대항할 것을 호소했고, 대항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연설 한 달 후인 5월 13일에 긴급조치 9호가 발령됐는데 이를 예견하듯 “떳떳이 나와서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싸우고, 떳떳이 나오기가 어려운 여건에 있는 사람들은 익명으로라도 엽서로, 전화로, 민주주의를 위해서 싸우는 사람들을 격려해서 그분들이 좌절되지 않도록 해줘야 됩니다. 우리 민주주의가 회복된다는 것을 그것은 틀림없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내가 보증하겠습니다.”라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반드시 회복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김 전 대통령은 2009년 6월 서거 두 달 전, 6·15 남북공동선언 9주년 기념식에서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입니다. 여러분”이라고 유언처럼 이 말을 다시 남겼다.
김대중 전 대통령 영화 ‘길 위에 김대중’, 내년 1월 개봉
김대중 전 대통령은 평생 용서와 평화를 추구했던 정치가이자 사상가요 민주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였다. 정치적으로 수많은 핍박과 고난을 겪었음에도 정치 보복을 하지 않고, 관용과 화해의 정치를 몸소 실천했다. 자신을 죽음의 문턱까지 몰고 간 이들을 끝내 용서했고, 지역주의 폐해의 최대 피해자였음에도 통합의 정치를 펼쳐 국민을 하나로 만들었다.
평생을 자신 보다 국민과 국가를 위해 헌신하신 김 전 대통령을 기억하는 시민사회와 영화계가 2024년 김대중 전 대통령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영화를 제작했다. 2013년 김대중추모사업회가 기획해 영화가 탄생하기 까지 무려 10여 년이 걸렸다. 다섯 번의 죽을 고비와 네 번의 국회의원 선거와 세 번의 대선을 낙선하고, 대통령이 되기 까지 김 전 대통령의 생애를 단 두 시간에 담아내기가 얼마나 어려웠을지 가히 짐작이 되지 않는다. 12월18일 서울 시사회를 시작으로 광주, 부산, 전주 등 전국에서 시사회를 갖고, 2024년 1월10일 국내외에서 동시 개봉한다.
서울의 봄과 길 위에 김대중
영화 ‘서울의 봄’을 먼저 보고, ‘길 위에 김대중’을 시사회에서 봤다. 감회가 남달랐다. 영화를 통해 기성 세대는 역사를 다시 기억하고, 젊은 세대는 역사를 배운다고 한다. 서울의 봄을 통해 전두환의 12.12 군사 반란을 상기(想起)하자. 영화 ‘길 위에 김대중’을 통해 여전히 진행 중인 대한민국의 아픈 역사를 방관(傍觀)하지도 말고, 비굴(卑屈)하게 살지도 말자. 우리 모두 ‘행동하는 양심’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