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제식 세계와 공장식 세계 / 천세진 |
| 2024년 01월 07일(일) 19: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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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특별하기는 하다. 인간의 것과 인간의 것이 아닌 것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모든 영역에서 모호한 지대가 생겨나고 있고, 이젠 음악도 그런 것 같다. 수제음악과 공장음악(AI가 생산한)으로 나누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구분할 수가 없다. 그럼 어떻게 감동해야 할까? 수제식 대응형의 감동과 공장식 대응형의 감동으로 나누어야 할까? 가능한 일이 아니다. 감성은 그런 일에 둔감하고, 그러기엔 차이가 무의미한 지점까지 와버렸다.
단일 악기로는 가장 풍부한 음악 세계를 만들어내며 ‘작은 오케스트라’로 불리는 피아노를 가지고 이야기를 해봐야겠다. 피아노가 인간을 벗어난다면 어떤 음악이 만들어질까? 여전히 천재적인 연주자가 탄생하고 그들의 연주가 찬사를 받고 있지만, 이미 200년 전쯤인 1829년 에드워드 르보에 의해 ‘자동피아노’가 탄생하며 피아노는 인간의 몸에서 벗어난 영역을 만들기 시작했다. 200년 전에는 조악했겠지만 이젠 아니다.
인간은 최대 열 개의 손가락으로 건반을 두들길 수 있지만 ‘자동피아노’는 동시에 스무 개의 건반도 두들길 수 있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곡들처럼 평범한 사람은 닿을 수 없는 고도의 실력을 가져야만 연주할 수 있는 곡도 인간에 의해 연주될 것을 전제로 만들어졌다. 인간의 몸이 가진 한계를 벗어나서 연주될 수는 없다.
물론 작곡상으로는 얼마든지 한계를 벗어날 수 있다. 열다섯 개의 손가락으로 건반을 동시에 두들기는 곡을 작곡할 수는 있다. 다만 연주할 수 없을 뿐이다. 자동피아노는 연주가 가능하다. 어쩌면 자동피아노의 음악이 인간의 음악보다 더 깊고 웅장할 수도 있다. 인간이 직접 연주하는 것을 전제로 한 음악은 일정한 건반 개수 안에서 이루어지지만 자동 피아노는 제한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단순히 더 많은 건반을 동시에 두들긴다는 기술적인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더 많은 건반을 두들긴다고 해서 조화로운 화음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 가능성에 의해 만들어지는 음색과 음의 무게가 우리가 알고 있던 음악의 세계를 확장해 줄 수도 있다. 꽤 매력적인 불협화음을 포함하여 생각지도 못한 조합의 화음이 탄생할 수도 있다.
음악은 연주에 있어서 몸이 갖는 한계성이 분명하다. 그 때문에 AI가 연주하는, 인간의 몸으로는 실현할 수 없는 가능성을 이용해 만들어낸 음악이 한 장르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건반을 포함한 악기들이 갖고 있는 최대치의 활용을 통해 인간이 상상하지 못한 것이 만들어질 수 있다.
실은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콘론 낸캐로우(1912-1997)는 1948년부터 인간이 아닌 자동피아노가 연주하는 <자동 피아노를 위한 연습곡> 연작을 49곡이나 만들었다. 이제 그 작업을 인간이 아니라 AI가 최대치로 수행하고 연주까지 하는 일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대중음악이 아니라 고도의 복잡성을 가진 클래식 음악이 인간을 벗어난 영역에서 만들어졌을 때 인간은 그 음악을 어떻게 받아들이게 될까? 몹시 궁금해진다.
음악, 미술, 문학 중에서 음악의 시장이 가장 크다. 수제식 창작이 아닌 공장식 창작이 가장 많이 도입된 영역도 음악이다. 이미 AI 친화적인 환경이 만들어져 있다. 인간의 몸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세계를 받아들이고 확장하는 일도 이미 진행 중이다. 그런 일들이 모든 영역으로 확대될 것이다. 지금까지는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의 문제였다. 언젠가는 그런 문제제기 자체를 신기하게 여기는 시대가 올 것이다.
두려운 일인지 반가운 일인지 잘 모르겠다. 모든 새로운 사상, 사물, 기술은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품게 했다. 그리고 언제나 절망이 희망보다 더 높은 비율로 현실화 되었다. AI와 함께 만들어지는 세계도 희망과 절망을 함께 품고 올 것이다. 희망과 절망이 어떤 비율로 현실화 될 것인가는 인간에게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