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이 일으키는 슬픔 / 천세진
2024년 09월 01일(일) 19:25
천세진 문화비평가·시인
도서관에 자주 가지만 오래 머물지는 않는다. 필요한 책만 챙겨 곧바로 빠져나온다. 독하고 검은 공기가 가득한 공간으로 느껴져서다. 도서관에 오래 머물려면 슬픔을 감당해야 한다.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지만, 질 낮은 슬픔이어서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다.

도서관은 변했다. 현재 지내고 있는 전주는 아름다운 도서관들을 가졌다. 도서관마다 색다른 디자인과 풍광으로 책을 읽는 공간만이 아니라 놀이터와 쉼터 역할도 하고 있다.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던 예전의 모습과는 다르게 사람들이 가득하지만, 그런 모습이 기껍게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아름답기만 하면, 편하고 즐거운 놀이터가 되기만 하면 되는 걸까? 도서관은 결국 책이 사는 집이다. 집은 집다워야 한다. 도서관이 도서관답다면 책으로 결정되는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그런 정체성이 흐려지면 대형 북카페와 무엇이 다를까.

무작정 도서관을 욕할 수는 없다. 시민들의 요구와 시대 조류를 피해 갈 수는 없다. 문제는 이 시대의 조류가 질이 아니라 양에 있다는 점이다. 얼마 전 만난 분에게서 책의 양과 질에 대한 소회를 들었다. 수만 권의 책을 읽었다는 이가 쓴 책을 읽었는데, 수만 권의 책을 읽은 내공을 조금도 확인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는 것이다.

수만 권의 책을 읽는 게 가능할까? 문고판이나 만화책, 듬성듬성 편집한 자기계발서를 읽는 게 아니라면 그건 불가능하다. 읽는 것이 아니고, 말 그대로 보는 것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다. 빠르게 종이를 넘기며 눈으로 훑는 것이라면 하루에 열 권이 아니라 수십 권도 볼 수 있다.

수만 권의 책을 읽었다는 이에게 물어보고 싶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 근대』,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 클라우디오 마그리스의 『다뉴브』, 비톨트 곰브로비치의 『페르디두르케』 같은 책을 하루에 다 읽었는지 말이다. 수만 권을 읽었다면 당연히 명작들인 그 책들도 읽었을 것이다.

책의 세계는 양의 세계가 아니라 질의 세계다. 수만 권의 책을 읽었다는 공언이 축적을 조금도 보장하지 않는 세계다. 제대로 된 책을 읽는다면, 사람은 죽을 때까지 5천 권의 책을 넘기기 어렵다. 수만 권의 책을 읽었다면 이미 인류 지성계에 이름을 휘날리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이들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다. 다른 일들은 양적 노력이 빛을 발한다. 책의 세계도 그런 법칙이 통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단, 양이 절대적인 변수로 작동하지 못하는 세계가 있는데 바로 책의 세계다.

도서관은 시대와 문화권의 초상이다. 그 초상 속으로 가치를 부여할 수 없는 형편없는 책들이 가치 있는 책들과 비슷한 무게와 가격으로 쏟아져 들어간다. 명품과 천품이 똑같은 기준으로 꽂혀있는 신간 코너를 보면 슬퍼진다. 책에 대한 식견이 작동하지 않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어느 영역이나 장르든 명품의 세계가 존재한다. 다른 세계의 명품들은 하나의 가격이 일반품들의 백 배, 천 배가 된다. 명품은 가격의 문제가 아니다. 가방 천 개를 모아놓는다고 명품 가방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책의 세계에서는 명품과 일반품이 똑같은 취급을 받는다. 그런 기이한 풍경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을 책들의 집인 도서관에서 발견하기 때문에 슬프다.

거의 모든 세계에서 돈만 있으면 명품을 얻을 수 있다. 수천억쯤 가지고 있다면 명화도 얻을 수 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책은 명품과 천품(賤品)의 가격 차이가 나지 않는다. 명품의 가격이 그토록 싸니 천 권쯤 사서 그것만 머릿속에 담아도 될 텐데, 담는 이가 많지 않다. 그보다 기이하고 슬픈 광경이 없다.

한국이 대단한 나라라고 들이대는 증거들을 보면 하나같이 양적인 것들이다. 그렇게 대단하다면, 명성에 필적하는 높은 수준의 지적 소산을 인정받고 있는가? 전 세계인들이 손에 꼽는 작품이 있는가? 세계 유수의 기관들에서 추천하는 명저에 한국 작품은 없다.

작가들의 책을 저작권을 인정하지 않고 도서관에 비치하는 나라다. 신작 영화를 하나 사서 전국 도서관에서 상영하면 저작권 문제로 난리가 날 것이다. 문제는커녕 책의 저작권을 인정하지 않고 도서관에 비치하는 것을 시혜처럼 생각하는 나라가 한국이다.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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