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힘없는 나라의 서러움 / 오수열 |
| 2025년 03월 18일(화) 19: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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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의 마지막 날인 28일 미국 백악관에서 있었던 트럼프-젤렌스키 정상회담 장면은 1945년 8월 제2차 세계대전 후 형성된 국제관계의 기본 틀이 80년 만에 완전히 무너져 내렸음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잘 알려진 바이지만 스스로 세계의 경찰국가임을 자처한 미국의 주도하에 형성된 전후 국제질서는 첫째 ‘주권평등의 원칙’, 둘째 ‘영토보존의 원칙’에 기반 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원칙하에 세계의 평화와 질서가 유지되기 위한 여러 제도적 정치들이 미국 주도하에 만들어졌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국제연합(UN)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이다.
물론 이러한 원칙과 제도적 장치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세계에서는 강대국의 약소국들에 대한 침략과 주권이 무시되는 불평등한 사례들이 적지 않게 발생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초강대국가를 중심으로 대립관계가 유지돼 왔던 냉전체제 하에서는 물론이고, 1980년대 말 소련의 해체이후 등장한 다극적(多極的) 신냉전체제 하에서도 자기 진영에 대한 최소한의 우의(友誼)와 신뢰 그리고 협력이라는 도덕적 규범은 유지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2017년 미국에서 트럼프행정부가 출범하고 2022년 우크라이나전쟁의 발발과 특히 금년 초 트럼프2기행정부의 등장 이후 전개되고 있는 국제관계에서는 지난날 유지되고 통용돼 왔던 원칙과 규범 등이 송두리 채 무시되고 있는 모습이다.
다시 우크라이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동유럽의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한 우크라이나는 1922년 소비에트연방에 합병, 소련의 일부가 됐으나 소련이 해체되면서 1991년 독립국가가 됐다.
독립 당시 우크라이나가 핵탄두 1천700여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170기를 보유한 세계 3위의 핵 무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우크라이나가 1994년 12월 유럽안보협력기구(OSCE)에서 미국·영국·러시아로부터 독립과 영토의 보전 및 경제지원을 약속 받는 대신 핵무기를 포기하는 ‘안전보장양해각서’를 체결하면서부터 우크라이나의 비극적 운명은 비롯되지 않았을까 싶다.
이로부터 20년 후인 2014년 2월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정권교체기의 혼란 속에서 크림반도 내의 러시아계 주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크림반도를 무력 침공했고, 결과적으로 크림반도는 러시아 영토에 합병했다.
이때 미국 등 서방국가들이 보였던 이중적이고 어정쩡한 태도는 국제관계에서 내분에 휩싸인 약소국가의 처지가 얼마나 위태로울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후 안보 불안을 느낀 우크라이나가 EU와 NATO 가입을 도모하는 등 친서방정책을 추진하면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관계는 긴장의 연속이었고, 마침내 러시아는 2022년 2월 돈바스지역의 러시아계 주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다시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전쟁은 3년 넘게 지속 되고 있다.
물론 미국과 EU회원국들은 러시아의 침공을 비난하며 우크라이나를 지원하였지만 여기에서도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단일대오(單一隊伍)가 형성되지 못했고, 현재 우크라이나는 영토의 20% 가량을 상실한 상황에서 트럼프행정부로부터 외교적 패싱과 함께 광물자원 채굴권을 미국에 양도할 것을 강요받는 굴욕적 내용의 종전협상 압박을 받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주권 평등의 원칙에 따라 외교에서는 국력의 강약을 떠나 대등한 예우를 갖추는 것이 관례임에도 ‘백악관 회담’에서 보여준 미국의 태도는 결코 우방 국가를 배려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당신에게는 협상카드가 없다”, “감사할 줄 모른다”, “예의가 없다”는 등의 막말이 오간 끝에 거의 쫓겨나듯 백악관을 떠나는 젤렌스키의 모습에서 우리는 약육강식의 국제관계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는 약소국가 대통령의 처지를 느낄 수 있었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이 결코 남의 나라 일이 아니라는데 있다. ‘MAGA’(Make America Great Again) 모자를 쓰고 다니며 우방국가에 대해 관세폭탄을 퍼붓는 미국의 모습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만약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한다면 우리는 미국의 안보우산 밑에서 평화를 지킬 수 있을 것인가?
해방 후 우리 민중들에게서 회자되었던 “일본 놈 일어난다, 소련 놈에게 속지 말고 미국 놈 믿지 말라.”는 말이 뇌리를 맴도는 가운데 선장(船長) 없는 이 나라의 앞날이 참으로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