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훤의 사위, 왕건의 장인이 된 박영규 [노성태 원장의 남도인물열전](9)박영규

2025년 03월 19일(수) 19:29

해룡산성 전경(순천시 홍내동·오천동 일대)

- 후백제 건국 1등 공신이 되다 -
신라 말 세 영웅이 있었다.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 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 고려를 건국한 왕건이 그들이다. 이 중 후삼국을 통일한 분이 개성 출신의 태조 왕건(王建, 877-943)이다. 태조 왕건에 의한 후삼국 통일에 큰 공을 세운 남도인이 몇 명 있다. 고려 제2대 왕 혜종의 모친인 나주 출신 장화왕후 오씨, 대구 공산 전투에서 견훤에게 포위된 왕건을 구하고 전사한 곡성 출신 신숭겸, 왕건이 왕이 될 것을 예언한 영암 출신 최지몽, 태조 왕건과 제3대 왕 정종의 국구(國舅, 왕의 장인)가 된 승주 출신 박영규가 그들이다.

견훤의 사위이면서 왕건의 장인이 된 박영규(朴英規, ?-970)가 언제 태어났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970년에 사망한다. 순천문화원에서 펴낸 ‘지명을 찾아서(1998)’에 의하면 박영규의 무덤과 묘지석이 대전광역시 유성구에서 발견됐는데 묘지석에 박영규의 사망 연원이 970년 6월로, 부인은 견(甄)씨로 기록돼 있었기 때문이다.

박영규가 순천에서 태어난 인물임은 분명하다. 그가 순천 출신임은 오늘 순천 박씨의 중시조가 돼 있고 죽은 뒤 해룡산신, 즉 승주·순천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숭앙받고 있는 것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또한, 박영규는 견훤의 휘하에 들어가 각종 전투에서 큰 전공을 세웠는데, 이때 ‘승주장군’으로 불렸고, 고려 귀부 후 개국공신이 됐을 때 ‘승주군’(昇州君)에 봉해진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박영규의 해상 세력 중심지였던 순천시 조양포 일대

박영규는 해룡산 아래 조양포 일원을 근거로 해상무역을 통해 세력을 키운 해상 세력이었다. 박영규는 해상무역으로 경제적 기반을 다졌고, 대 호족으로 성장한다. 그리고 손잡은 사람이 견훤이었다. 박영규와 그 부친은 견훤이 서남해안 방수군으로 재임할 때부터 인연을 맺은 사이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박영규는 견훤의 거병에 가담했고 전남 동부 지역 호족의 협조를 유도함으로써 견훤의 자립과 후백제 창업에 큰 공을 세운다. 박영규는 견훤의 딸인 견씨와 혼인하면서 견훤의 핵심 참모가 됐고, 견훤에게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 박영규는 후백제 건국의 1등 공신이었다.

-고려에 귀부하다-

‘1872년 순천도호부 지도’에 그려진 순천시 조양포 일대(아래 동그라미 일대)

박영규가 후백제를 등지고 고려에 귀부하여 고려 태조와 제3대 왕 정종의 장인이 된 전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후백제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후백제가 건국된 후 43년째 되던 935년, 견훤의 큰아들 신검이 두 아우인 양검, 용검과 함께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다. 이후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金山寺, 전북 김제)에 가둔다. 이에 견훤은 금산사를 탈출, 고려의 전진기지였던 나주를 거쳐 고려 왕건에게 투항한다.

후백제 건국 43년 만에 신검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났던 것은 왕위 계승 때문이었다. 견훤은 체구가 크고 지략이 많은 넷째인 금강을 편애했고 왕위를 계승시키려고 했다. 금강의 왕위 계승에 그의 형인 신검·양검·용검 등이 불만을 품게 된다. 935년 3월, 이찬(伊飡) 능환이 강주(康州, 진주) 도독인 양검과 무주(武州, 광주) 도독 용검 등을 사주했고 이들은 군사를 동원해 금강을 죽인다. 그리고 부친인 견훤마저 금산사에 유폐시킨다.

견훤의 사위였던 박영규는 신검 등이 일으킨 쿠데타를 용납할 수 없었다.

이는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호랑이 같은 왕이 눈 뻔히 뜨고 아들 신검에게 쫓겨나다니,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대명천지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 아버지를 배반한 패륜아를 어찌한단 말인가….”라는 박영규의 말 속에 잘 담겨 있다. ‘승주 장군’ 박영규는 신검의 쿠데타를 인정할 수 없었고, 그래서 특단의 조치를 취하게 된다.

박영규가 취한 특단의 조치는 ‘고려사’ 박영규 열전에 실린 부인과의 다음 대화를 통해 확인된다. “박영규가 자기 아내와 은밀히 이야기하기를, ‘대왕(견훤)께서 40여 년 동안 힘써 노력하셔서 공업이 마침내 달성되려 하였는데, 하루아침에 집안의 재앙으로 영토를 잃고 고려에 투항하셨소. 무릇 정숙한 여자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고, 충성스러운 신하는 두 주인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오. 만약 나의 군주(견훤)를 버리고 도적놈(신검)을 섬긴다면 무슨 낯으로 천하의 의사를 볼 수 있겠소. 더욱이 듣건대 고려의 왕공(왕건)은 인자하고 후덕하며 부지런하고 검소하여 백성의 마음을 얻었다고 하니 아마도 하늘의 계시인 듯하오. 반드시 삼한(三韓)의 주인이 될 터이니, 어찌 서신을 보내어 우리 왕(견훤)을 위로하고 아울러 왕공에게 간절함을 보여서 장래의 복을 도모하지 않을 수 있겠소?’라고 하였다. 그의 아내가 말하기를, ‘당신의 말씀이 제 뜻입니다’라고 하였다.”

‘고려사’ 열전에 보이는 박영규

박영규가 부인에게 제안한 특단의 조치는 왕건에게의 귀부였다. 이에 부인이 흔쾌히 허락하자 박영규는 사람을 태조 왕건에게 보내 귀순 의사를 전한다.

‘고려사’ 박영규 열전에는 이에 대한 모습이 다음처럼 기록돼 있다. “936년(태조 19) 2월, 박영규는 마침내 사람을 보내 귀순 의사를 밝히고 또한 말하기를, ‘만약 의로운 군대를 일으키신다면 내응하여 왕의 군대를 맞이하고자 합니다’라고 했다. 태조가 크게 기뻐하며 그 사신에게 후하게 하사하고 돌아가서 박영규에게 알리게 하기를, ‘만약 그대의 은혜를 입어 길에 막힘이 없다면 먼저 장군을 만나 당에 올라 부인에게 절을 올리며 형처럼 모시고 누이처럼 받들 것이오. 반드시 죽을 때까지 후하게 보답할 것이니, 천지의 귀신이 모두 이 말을 들었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박영규는 왕건에게의 귀부를 넘어 “고려가 의로운 군대를 동원한다면 내응하여 고려군을 맞아 돕겠다”는 뜻마저 전한다. 이에 왕건은 동년 9월, 후백제 제2대 왕이 된 신검을 타도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킨다.

왕건이 동원한 병력은 보군(步軍)과 마군(馬軍) 등 7만여 명이었다. 왕건은 7만여 명의 군대를 좌·우익군과 중군, 조력군으로 편성한 후, 견훤과 함께 병사들을 사열한다. 그리고 직접 군대를 통솔해 천안부를 거쳐 일선군(경상북도 구미)으로 진격,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진을 친다. 이윽고 고려의 삼군이 북을 울리면서 전진하자, 후백제군은 전의를 상실한다.

‘고려사절요’에는 “후백제 장군 흔강 등 3천200명을 사로잡았고 5천700명의 머리를 베었다”라고 기록돼 있다. 고려군의 대승이었다. 신검이 두 동생인 양검·용검 및 문무 관료들과 함께 항복하였고, 후백제는 역사에서 사라지고 만다. 이 해가 936년이었다.

후백제가 항복하자 왕건은 신검에게 관직을 줘 위로한다. 신검이 참람하게 왕위에 오른 것은 다른 사람의 위협을 받아 그러한 것이지 자신의 본심이 아니었고, 또 투항해 죄를 빌었다는 것이 그 명분이었다. 대신 쿠데타를 사주한 능환의 목을 베었으며 쿠데타에 적극 가담한 신검의 두 아우인 양검과 용검은 진주로 유배 보낸 후 죽인다. 자신이 건국한 후백제의 최후를 지켜본 견훤은 결국 근심하고 분개하다 황산에 있는 한 사찰에서 등창이 나 죽는다.

- 태조·정종의 장인이 되다 -
후백제가 멸망되고 견훤마저 분을 삼키지 못하고 사망했지만, 고려 조정에서 크게 환영을 받은 인물이 있다. 고려 귀부를 알리고, 안에서 내응한 박영규다. 왕건은 신검을 토벌해 후백제를 멸망시킨 후 박영규에게 “견훤이 나라를 잃고 멀리 온 이후로, 그의 신하들 가운데 아무도 위로하거나 도와주는 이가 없었다. 오직 경 부부만이 천리 밖에서 소식을 이어 성의를 보내고, 아울러 과인에게 귀순 의사를 밝혔으니 그 의리를 잊을 수 없도다”라며 박영규를 좌승(佐丞)에 임명하고, 토지 1천경을 하사한다. 그리고 역마 35필로 가족을 맞아오게 했으며, 두 아들에게도 벼슬을 주는 등 최고의 대접을 했다. 좌승은 고려 초기의 관등으로 16등급 중 6번째에 해당된다.

고려에 귀부한 후 박영규는 고려 조정의 실력자로 부상한다. 그의 세 딸이 태조의 17번째 부인인 동산원부인, 정종의 제1,2비인 문공왕후와 문성왕후가 되면서 고려 태조 및 정종의 국구(國舅, 왕의 장인)가 됐기 때문이다. 박영규는 뒤에 정1품 최고 품계인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른다.

- 해룡산신이 되다-
부왕 견훤을 배반한 패역의 아들 신검을 버리고 태조 왕건에게 내응해 삼국 통일을 도운 승주(순천) 출신의 박영규, 그는 죽어 ‘해룡산신’이 된다.

그가 해룡산신이 됐음을 16세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박영규가 해룡산신이 되었으며 해룡산에는 해룡산사(海龍山祠)가 있었다”는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해룡산사는 박영규를 모시던 사당이었을 것이다.

노성태·남도역사연구원장

박영규가 죽어서 해룡산신이 됐다는 것은 박영규를 중심으로 한 세력의 주무대가 바로 해룡산 일대였음을 의미한다. 후대의 기록이지만 1784년(정조 8) 조현범이 지은 ‘강남악부’(江南樂府)의 ‘인제산조’(麟蹄山條)에 “박영규는 해룡산 아래 홍안동에 웅거하고 있었다”라는 기록은 이를 뒷받침해 준다. 지금 순천 해룡산성은 순천시 홍내동·오천동 일원에 걸쳐 있는 해발 75m의 낮은 야산에 자리 잡고 있다.

해룡산 아래 항구가 조양포다. 조양포의 원래 이름은 사비포였는데, 992년(성종 1) 조양포로 명칭이 바뀐다. 조양포는 현재의 전남 순천시 홍내동의 해룡산 밑에 위치한 포구로, 고려시대에 ‘해룡창’이라는 조창이 설치된 해상교통과 해상운송의 중심지였다. 해룡창은 순천만 안쪽 깊숙한 곳으로 동천과 이사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해당한다.

해룡창이 있던 조양포구는 박영규가 순천의 대 호족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정치·경제적 기반이었다. 해룡창이라는 조창이 있었던 순천만은 ‘순천만 습지’로 보존돼 철새들의 낙원이 됐고 동천과 이사천이 합류하는 주변은 ‘순천만 국가정원’이 만들어져 오늘 또 순천의 명소가 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