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거부자와 여행 / 천세진 |
| 2025년 05월 18일(일) 2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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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1632-1677, 네덜란드 철학자)는 어느 글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행복 속에 포함된다. 우리의 삶은 기쁨이었던 옛날의 무엇을 소비한다.” 맞다. 인간의 소비는 어떤 형태이든 삶의 기쁨을 얻고 행복을 맛보려는 욕구를 실현하는 방식이다. 절망과 불행을 맛보기 위해 생을 소비하지는 않는다. 그런 악취미도 존재할 수 있지만 정상의 범주에 넣을 일은 아니다.
여행을 거부하는 이유는 기대하는 것을 얻지 못하리라는 확신 때문이다. 여행은 시대마다 다른 양상으로 전개됐다. ‘여행’이라는 단어만 같이 사용할 뿐, 조건과 상황이 모두 다르다. 가장 큰 변화는 여행지 자체가 변했다는 점이다. 여행은 공간을 토대로 이뤄지는 활동인데, 토대가 되는 공간의 조건들이 근본적으로 변했다면 여행의 의미를 단순하게 대입해서는 안 된다.
니콜라 부비에(1929-1998, 여행작가)는 친구 티에리 베르네(1927-1993, 화가·삽화가)와 1953년부터 1954년까지 제네바에서 출발해 유고슬라비아, 터키, 이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의 카불에 이르는 여행을 했고 그 이야기를 『세상의 용도』란 책에 담았다. 70년 전쯤의 세계 여행이 어떤 문화적 풍경 속에서 이뤄졌는지를 가늠하기에 좋은 책이다.
1953년 당시의 세계인구는 26억 명쯤이었다. 지금은 80억 명에 육박한다. 같은 여행 공간에 4배가 모인다는 계산이 가능한데, 1953년은 도시로의 인구 집중화가 지금처럼 이뤄지지도 않았던 때였다. 그 점을 고려하면 지금은 같은 여행지에 10배 이상의 여행자가 몰려 있다고 보면 맞을 것 같다. 1950년대의 어느 유명 관광지도 현지 주민 수보다 관광객 수가 더 많은 사례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관광객 수가 현지인들보다 많은 곳이 여럿 존재한다.
그런 변화가 일어난 공간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여행의 중요한 가치는 다른 방식으로 시간이 작동하며 축적해 놓은 문화적 풍경을 살펴보고 내가 속한 공간에 흐르는 시간이 축적해 놓은 문화와의 차이와 공통점을 찾아내는 일이라고 믿는 이에게 현재의 여행은 무의미하다. 공간이 관광산업을 위해 재편되어 있다면 고전적 여행의 가치는 어디에서도 얻어지지 않는다.
니콜라 부비에는 어느 여행지에서 이런 소회를 남겼다. “침묵 속에서 하루가 끝나간다. 우리는 저녁을 먹으면서 실컷 얘기를 나누었다. 여행은 엔진 소리와 스쳐가는 풍경에 실려와서 당신의 몸을 관통하고 당신의 머리를 환하게 밝혀준다. 아무 이유 없이 받아들인 생각은 당신을 떠난다. 반대로 다른 생각이 새로 정리되어 강 밑바닥의 조약돌처럼 당신 가슴속에 자리를 잡는다.” 그가 남긴 소회는 본질적으로는 공감할 수 있지만, 현 시대에는 느끼기 어려운 것이 되었다. 그의 여행기에는 발 디딜 틈 없이 들어찬 관광객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구 조건 외에 또 달라진 점은 문화적 조건이다. 1950년대는 세계화가 이뤄지지 않은 시대였다. 부비에와 친구는 가는 곳마다 관광객이 아니라, 이방인으로서의 존재감을 더 많이 느꼈을 것이다. 부비에는 어느 지역에서 공포를 느꼈다고 썼다. 1950년대는 멀리서 찾아오는 외부인이 관광객일 수 없는 시대였다.
관광지에서 현지인들의 친절을 느꼈다고 말한다. 당연하다. 고객에게 불친절할 수는 없다.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는 관광객을 친절하게 대하고 관광객을 사랑한다. 진정으로 사랑해서는 아니다. 돈을 쓰려고 온 관광객이 아니라 돈을 벌려고 온 이방인이 되면 응대가 달라진다.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 이방인은 불친절과 증오를 경험한다. 공격당하고 추방당한다.
전 세계의 현지인들이 상업적 친절을 익히고 있는 시대다. 자신들만의 삶을 오롯이 사는 지역은 이제 찾기 어렵다. 현지인에게서 오래 이어져 온 이야기를 들으며 서로 서서히 경계를 풀고, 낯선 침묵 속에서 잠드는 일은 이제 불가능하다. 24시간 내내 상업적 친절이 준비된 곳을 여행하는 일이라면 거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