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쓸쓸해서 더 소중한 늦가을 / 박노식 |
| 2025년 11월 10일(월) 18:19 |
|
한때 정들었던 사람이 불현듯 곁을 떠날 때의 야속함과 처연함이 저 들판 가운데 숨어 있는 듯해서 늦가을은 잃어버린 정을 눈물겨워하는 바보 같은 사람의 흉중을 닮았다.
하지만 휴일 하오의 산책길을 홀로 걷는 일은 고요와 적막을 마음에 들이는 것이므로 소중한 자신을 발견하게 한다. 소로나 농로를 걷다 보면 숱한 야생화를 만나게 되고 간혹 꽃들이 말을 걸어와서 걸음을 멈출 때가 있다. 벌개미취, 쑥부쟁이, 구절초를 구별하면서 눈길을 떼지 못하는 호기심은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만든다.
한때나마 누런 들판을 보면서 마음의 여유와 눈의 즐거움을 만끽했지만, 자연은 늘 지혜로워서 상황을 변화시킬 줄 안다.
눈을 들어 무연한 눈빛으로 멀리 강 건너를 살펴보면 노란 은행나무가 강 따라 줄지어 서 있다. 멀어서 더 아름다운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정경이 위로를 준다. 벼의 누런 빛이 어느새 은행나무에 정을 주었는지 노랗게 물든 잎들이 소곤거리듯 얌전해 보인다. 빼앗긴 벼의 누런 빛을 은행나무의 노란 잎에서 발견하고 나서야 잃어버린 빛에 대한 서운함이 조금은 가시는 것 같다.
휴일 늦은 아침에 모처럼 벗을 만나러 대처에 나갈 때, 그 은행나무 가로수 길을 지나갈 무렵에는 왠지 기분이 착 아래로 가라앉는다. 코스모스가 길 따라 연이어 늘어서 있는 모습이 외로워 보이기 때문이다. 함께 하늘거려도 보는 사람에 따라 외로우면 외로운 거다.
가을이면 어김없이 흘러나오는 가수 김상희의 ‘코스모스 피어있는 길’을 듣노라면 절로 경쾌하고 흥겨워서 마치 바람에 하늘거리는 코스모스처럼 몸과 마음이 한들한들해질 때가 있다. 김상희도 그런 느낌과 분위기로 노래를 했다고 하는데, 어느 날 작사가로부터 그 가사가 나온 연유를 듣고는 기분이 조금 달라졌다고 한다.
그래서 “좀 어둡게 할까요?” 했더니 “아니요” 했다는 것이다. 내용인즉, ‘아주 친한 친구의 죽음을 맞아 장지까지 갔다 오는 버스 안에서 코스모스가 피어있는 밖을 보며 그 친구가 연상 돼 바로 그 자리에서 노랫말을 지었다.’고 한다.
이처럼 슬픈 이야기를 작곡가는 경쾌한 멜로디로 만들어 놓았으니, 경쾌함 속에는 슬픈 사연이 숨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알고 보면 인생이 먹먹해지는 경우가 다반사 아니던가.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있는 길/ 향기로운 가을 길을 걸어갑니다// 기다리는 마음같이 초조하여라/ 단풍 같은 마음으로 노래합니다// 길어진 한숨이 이슬에 맺혀서/ 찬바람 미워서 꽃 속에 숨었네/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있는 길/ 향기로운 가을 길을 걸어갑니다.
‘길어진 한숨이 이슬에 맺혀서 찬바람 미워서 꽃 속에 숨었네’ 이 구절을 음미하면서 필자는 생각했다. 함부로 꽃 속을 들여다보는 건 가슴 아픈 일일 수도 있으므로 그냥 멀리서 감상하는 것이 낫겠다고.
그러나 윤동주(1917-1945)는 「코스모스」에서 어릴 적 부끄러움이 내 마음이라고 말하면서 그때의 그리움을 노래하기도 했다.
청초한 코스모스는/ 오직 하나인 나의 아가씨// 달빛이 싸늘히 추운 밤이면/ 옛 소녀가 못 견디게 그리워/ 코스모스 핀 정원으로 찾아간다// 코스모스는/ 귀또리 울음에도 수줍어지고// 코스모스 앞에 선 나는/ 어렸을 적처럼 부끄러워지나니// 내 마음은 코스모스의 마음이요/ 코스모스의 마음은 내 마음이다.
입동 지나자 월동 준비를 서둘러 마쳤다. 고작해야 거실 침상에 실내 텐트를 치고 보일러엔 난방 기름 두 드럼을 넣었을 뿐이다. 이 정도면 완벽하다. 부족한 난방은 통유리창으로 들어오는 한낮의 겨울 햇빛을 받아 가슴에 온기를 담으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