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울 산중에서 혼자 맞는 밤은 / 박노식 |
| 2025년 12월 08일(월) 18: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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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며칠 사이에 수만 장의 불그스름한 잎들이 모두 져서 사위가 환하고 깊어졌다. 걸리적거리는 게 없으니 보는 눈도 상쾌해진다.
하지만 저 나무는 지난여름에 초록의 물결 속에서 새들과 함께 노래하며 꿈을 꾸었다. 근심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명랑했던 잎들이 어느 날 문득 가을이 찾아와서 당황한 나머지 얼굴빛이 울그락불그락, 그래서 결국 짧은 기간에 사색만 남기고 제 모습으로 돌아간 것이다.
조금 빈 것은 아름답다. 틈이 있어서 기운을 불러일으킨다. 부족한 듯하여도 여유로움과 넉넉함이 있어서 기분을 살짝 들뜨게 한다.
울창한 잎들이 사라진 후에 드러난 가녀린 나뭇가지 사이를 보면 막힌 숨통이 터지고 지혜가 돌아오고 용서의 마음이 새록새록 돋아난다. 이해도 이와 같아서 조금의 빈틈이 있는 사람이라면 소통도 한결 쉬워질 것이다.
그래서 겨울은 이해와 용서의 마음을 배우게 한다. 타인을 향한 시선이 오롯이 자기 안으로 들어와 머물 때 이것은 가능하다.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는 건 자신의 영혼을 찾아가는 여정과 같은 것이다.
눈을 들어 먼 산을 바라볼 때 희끗희끗한 곳은 모두 빈 곳이다. 그곳에 눈길이 머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자신의 욕망을 돌아보게 하는 묘한 헛헛함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혹여 상처를 떨쳐내지 못하고 가슴에 묻어둔 이가 있다면 오직 겨울을 기다려 겨울 산에 눈을 주거나 겨울 산에 말을 걸면 한결 나아질지도 모른다. 겨울 산을 향하여 한껏 악을 써도 좋을 것이다.
이처럼 겨울 산은 앓는 사람을 치유할만한 격을 갖추었다. 왜? 비어있으니까.
필자의 지인 중에 유독 겨울을 사랑하는 이가 있는데, 그는 밀어내는 법을 모르고 받아들이는 것이 몸에 배어서 친근한 미소를 지녔다. 한데 그 미소 속에 슬픔이 고인 것을 타인들은 모르지만 필자는 안다. 미소는 정면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살짝 비켜 있을 때 읽어야 그 안에 숨어있는 비밀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겨울 산이 이와 같다. 감추지 못하니까.
머잖아 폭설이 내리면 산중 마을은 고라니의 눈망울처럼 순해져서 고요 속에 들고 강아지 몇 마리만 골목을 뛰놀 것이다.
적설을 머리에 인 노송은 밤새 그 무게를 못 이겨 가지 부러지는 소리를 새벽녘에 들려준다. 대숲은 서서히 눈의 무게를 받고 그대로 허리를 굽힌 채 일어나질 못한다. 큰 대는 오히려 위험해서 부러질 때 “쩌억” 소리를 낸다. 산중은 그만큼 비어서 고요와 적막의 거처가 된다. 이럴 때는 정지용(1902-1950)의 <장수산 1>을 음미하는 맛이 있다.
벌목정정(伐木丁丁)*이랬거니 아람드리 큰 솔이 베어짐 직도 하이 골이 울어 메아리 소리 쩌르렁 돌아옴 직도 하이 다람쥐도 좇지 않고 멧새도 울지 않아 깊은 산 고요가 차라리 뼈를 저리우는데 눈과 밤이 종이보다 희고녀! 달도 보름을 기다려 흰 뜻은 한밤 이 골을 걸음이랸다? 윗절 중이 여섯 판에 여섯 번 지고 웃고 올라간 뒤 조찰히* 늙은 사나이의 남긴 내음새를 줍는다? 시름은 바람도 일지 않는 고요에 심히 흔들리우노니 오오 견디랸다 차고 올연(兀然)히* 슬픔도 꿈도 없이 장수산(長壽山) 속 겨울 한밤내-
*벌목정정: 『시경(詩經)』의 ‘소아(小雅) 벌목(伐木)’ 편에 있는 구절. 커다란 나무를 산에서 벨 때 쩡 하고 큰 소리가 난다는 뜻. *조찰히: 맑고 그윽하게. *올연히: 홀로 우뚝하게.
겨울 산중에서 누구도 없이 혼자 밤을 맞고 살아가려면 밖에 귀를 주어야 한다.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와 솔바람 소리와 댓잎 부딪는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