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28일(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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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이기에, ‘광주의 이야기’이기에 더 절절한 감동이
광주시립극단 창작뮤지컬 ‘빛골아리랑’ 리뷰
이희규희곡작가

  • 입력날짜 : 2014. 05.27. 19:38
이희규희곡작가
연극이 끝났어도 관객은 일어설 줄 몰랐다. 뜨거운 박수가 극장을 열기로 몰아넣고 있었다. 군데군데 기립박수를 아끼지 않는 관객은 손을 흔들며 휘파람을 불어대고 있었다. 연극이 끝나면 소리 없이 일어서는 쓸쓸한 여느 연극과는 확연히 달랐다. ‘광주’이기에, ‘광주의 이야기’이기에 ‘빛골 아리랑’은 이렇게 감동으로 관객에게 다가선 것일까.

‘광주’가 잊혀져가고 있다. 심지어는 5·18이 폄하되기까지 하는 작금의 현실을 두고 ‘5월의 광주’는 끙끙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 더구나 새파란 장대 같은 어린 청소년을 진도 앞바다에 묻어버린 이 아픈 가슴의 부모들의 마음과 연결되어 ‘광주의 5월’은 신음 소리마저도 내지 못하고 안으로만 벌겋게 내연하고만 있다. 그 누구도 이제 ‘광주’를 ‘빛골’이라고 당당하게 말하기가 쑥스러워진 현실을 안으로만 개탄할 뿐, 올해 광주의 5월은 또 ‘임의 행진곡’도 온전히 부르지 못하고 넘어가고 있다.

광주 시립극단(예술감독 박윤모)이 작년에 이어 올해도 이러한 ‘광주’에 다시 ‘빛골 아리랑’을 내놓았다. 5월이 광주의 5월이 그나마 외롭지 않는 이유가 이 연극 한 편 때문이라고 한다면 억지일까. 아니다. 분명 뮤지컬 ‘빛골 아리랑’은 광주 사람들의 가슴을 쓰다듬어주고 있는 ‘광주사람의 광주 연극’이다.

창작뮤지컬 ‘빛골 아리랑’은 “1980년, 시대의 어둠과 부패를 향해 저항하며 온 몸으로 전진하던 맑고 고운 심성의 영혼의 빛, 광주 시민의 이야기를 막이 할머니의 처절한 침묵 속의 기억을 무대 언어로 표현했다”(연출가 유희성)는 말이 그것을 대변하고 있다.

뮤지컬 연극이 일반적으로 그렇지만 ‘빛골 아리랑’의 무대는 지극히 서사적이다. 장면의 사실성이라든가 집중된 연기로 극적 긴장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관객이 무대를 관조하게 하면서 무대를 비판의 눈으로 보게 한다. 그래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무대의 상황이 바람직한 세계인가를 스스로 되묻게 한다. 과장된 몸짓 연기와 비트가 강한 음악은 오히려 다양한 조명과 함께 이를 증폭 시켜 관객의 가슴으로 깊게 파들어 온다. 빛과 음악(소리)가 배우들의 집단 동작과 함께 그려지는 무대는 관객을 당시 5·18 현장으로 인도할 뿐만 아니라, 당시 현장에 있었던 시민들에게는 심장 떨리게 하는 현장감으로 뭉클하게 다가오게 하고 있다.

‘빛골 아리랑’은 주제가 무겁다. 그럼에도 그 주제에만 함몰되지 않고 관객을 감동으로 이끄는 데는 작품의 구조가 역사와 개인의 서정이 어우러지는 무대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때, 광주를 이야기할 때 ‘살아남은 자’로서의 죄인처럼 속죄의 심정으로 숙연해지던 시절도 있었다. ‘광주’의 상처가 너무 컸고, 그만큼 위대했기에 ‘광주’를 이야기하는 문학 작품마저도 경직성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보는 연극으로서 ‘극’의 세계는 훨씬 더 극적 장면을 연출해야만 관객의 기대에 부응하는 당위성의 연극도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술 매체의 속성이 미적 구조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고 했을 때, 보여지는 미적 쾌감에서 오는 감동의 극대화가 종종 이야기되기도 했다. 송막이할머니를 찾아오는 손녀로부터 시작되는 이 극은 할머니의 회상에서 과거가 그려지고 그것이 단순한 한 집안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 시대를 온몸으로 안고 뒹굴며 살아온 우리 민족사와 결부되면서, 나아가 그것이 광주의 현대사가 한국 현대사에 던지는 희생과 빛으로서의 의미를 획득해가는 ‘빛골 아리랑’은 주제를 넘어선 개인 서정성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빛골 아리랑’은 극의 확산과 집중이 변주되는 극적 상황을 반복해가며 무대를 전환 시켰다. 가변적인 무대, 평범한 벽들이 자유로이 이동하면서, 현대극의 특징이랄 수 있는 영상의 배경 설정은 때로는 키노드라마와 극적 현실을 병합해 놓은 듯한 환상을 만들어냈다. 끝없이 비춰지는 희생자의 명단에서 광주의 희생자의 영혼이 지금도 무대(광주)를 떠나지 못하고 있음을 표출하면서, 그것이 정체되어 있지 않고 물 흐르듯이, 아니면 관객 모두를 무의식의 세계에 참례시키는 듯한 분위기를 창출해냈다. 때문에 확산된 빛이 무대를 넘어 객석에까지 확장되고, 때로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집중된 장면에 몰입 시키는 장면이 반복되면서 관객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빛골 아리랑’을 한국적 ‘레미제라블’이라고 한다면 과장일까? 이 연극을 보고 난 몇몇 관객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그렇다고 한다. 레미제라블이 은촛대를 훔친 쟝발쟝의 이야기가 낳은 위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프랑스 그 시대의 역사적 상황을 담아낸 장대한 서사이듯, ‘빛골 아리랑’은 무등산 기슭에 사는 한 할머니의 한 많은 일대기가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시대 정신을 담은 웅대한 극이라고 말이다.

5·18을 그리는 연극이 가지는 한계는 있다. 시대가 변했고 사람들의 인식도 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으로 그렇기 때문에 5·18은 기억되어야 하고 그 정신은 이어져야 한다. 여기에 연극이 서야 할 자리가 있다. 연극은 단순한 예술이기 전에 태초에 지녔던 우리의 원초적 삶의 형태이며, 이러한 삶을 총체적으로 ‘보여주고’ ‘체험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타 지역과 다른 광주만의 자산은 광주 사람이 가꾸고, 광주 사람이 꽃 피워야 한다. 그 꽃을 피우는 일이야말로 빛고을의 예술인들이 해내야 할 일이 아닌가. 광주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광주를 넘어선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진실이다.

시립극단의 본연의 의무도 또한 그러할 것이다.

의향으로서, 그리고 예향으로서의 광주, 이를 잘 그려낸 ‘빛골 아리랑’이 지금도 가슴에 눈물 젖은 감동으로 남아 있는 것은, 아마 광주시립극단이 심혈을 기울여 아름답게 피워낸 꽃이기 때문이리라.

‘빛골 아리랑’이 ‘진도 아리랑’이나 ‘정선 아리랑’처럼 우리 모든 사람이 부르는 이 시대의 아리랑이 되기를 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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