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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왕자’ 김교각 스님의 등신불이 있는 중국 불교 4대 聖地 ‘구화산’
문병채 박사의 신 해양실크로드
중국에 건너가 등신불이 된 ‘신라 왕자’

  • 입력날짜 : 2014. 06.19. 20:18
① 구화산의 김교각 스님 등신불 위치도. ②하당마을 전경. ③지장육신보전. ④탑을 빙 둘러 등신불 모양의 자장보살 상이 놓여 있다. 이 탑 안에 김교각 스님의 등신불이 들어 있는데, 볼 수 없었다. ⑤김교각 스님의 신발
문병채 (주) 국토정보기술단 단장·전남대 지리교육과 겸임교수
중국 안휘성 구화산, 중국 4대 불교 성지 중의 하나다. 소설 속에만 있는 줄 알았던 등신불이 존재한다. 등신불이란 가부좌 한 체 열반에 든 육신에 금칠을 한 것이다.
서기 794년 한반도에 온 한 스님의 등신불이 모셔진 이후 불교성지가 된 것이다. 김교각 스님, 그가 신라 왕자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구화산(九華山)은 중국 안후이성 츠저우시(池州市) 칭양현(靑陽縣) 하당(荷塘, lijun)마을에 있다. 구화산은 중국 불교의 4대 성지 중 하나로 지장보살의 본산이다. 불교성지답게 구화산을 찾는 사람들도 많다. 가파른 돌계단에서 ‘삼보일배’ 하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구화산은 닌징(남경)에서 영동선을 따라 열차(쾌차·快車)를 타고 동릉(銅陵)에서 하차하면 되는데, 약 4시간40분이 소요된다. 열차에서 내려 주변의 남경, 황산 등지에서 이어지는 장거리버스를 이용하면 구화산까지 갈 수 있다. 황산에서 구화산까지 버스로 약 6시간 정도 소요된다.

구화산(지우화샨)으로 가는 길은 예상 외로 잘 닦여 있었다. 밀려드는 관광객 때문인 것 같다. 올라가는 동안 흰색 건물과 노란색 건물이 많이 보였는데, 흰색은 사람이 사는 집이고, 노란색은 사찰이라고 한다. 해발 1천352m로 아흔아홉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산세가 매우 아름답고 명승고적이 많아 동남 제일의 산으로 불리는 곳이다. 한창 때는 300여개의 사찰이 있었으나, 지금은 93개의 사찰만 남아 있다.

그 중에 국가중요사찰 9개, 성급중요사찰 30개와 불상 등 중요 문화재가 있다.


구화산은 신라 성덕왕의 첫 번째 왕자인 김교각 스님이 719년 이곳에 와 수행을 하면서 사찰을 세우고 99세의 나이로 열반에 든 곳이다.

김교각 스님은 794년 음력 7월 31일 제자들에게 마지막 말을 남기고 가부좌 한 채 열반에 들었다. “내가 죽거든 화장하지 말고 돌함에 넣었다가 3년이 지나거든 꺼내, 썩지 않았거든 내 몸에 금칠을 하여라.” 스님이 열반에 들자 구화산엔 기이한 일들이 벌어졌다고 한다. 바위가 떨어져 산이 울리는 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종을 쳐도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제자들이 3년 후 함을 열었을 때 썩지 않고 열반에 든 모습 그대로 남아 있고 시신을 들자 뼈마디에서 금쇠소리가 났다. 제자들은 스님의 육신에 금칠을 해 석함에 모시고 그 위에 탑을 세워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후 구화산은 여러 스님들의 등신불이 이어져 등신불의 성지이자 지장신앙의 본산이 되었다.

이미 살아 생전에 그의 높은 도행으로 말미암아 김지장왕이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죽은 후에 더욱 그러한 신앙이 굳어졌다. 그 후 지방보살로 추앙되었다.

김교각이 구화산에서 수도하던 시절 당대에 시인이었던 이태백이 구화진에서 서당을 열며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태백은 김교각을 만났고 그의 수행에 감탄하여 그를 기리는 시를 남겼다. “보살의 자비로운 힘 /끝없는 고통에서 구하나니 /하해와 같은 그 공덕 /세세손손 빛나리로다.”



김교각 스님의 등신불이 모셔져 있는 육신보전에 다가가자 가벼운 흥분과 함께 떨림 현상이 찾아왔다.

단순히 중국 전통의 풍광 때문만은 아니었다. 떨림은 사찰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오늘날에도 옛 모습을 거의 유지하고 있었다.

중국 대륙에서 만나는 신라인의 흔적! 그 낯섦은 강렬했다. 그러나 더욱 낯선 것은 이 사찰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였다.

지금으로부터 1200여년 전, 바로 이 공간을 중심으로 한 신라인의 고뇌에 찬 수행이 있었던 곳이다.



‘김교각 스님’ 그는 누구일까

김교각과 동시대를 산 ‘비관경’이라는 사람이 쓴 구화산 ‘화성사기’에 ”지장이라 불리는 김교각은 김씨 성을 가진 신라왕자”라고 적고 있다.
또한 구화산 아래 위치한 노전오촌, 오씨 일가가 긴 역사를 이어온 마을이 있다. 구화산 입산 전 김교각 스님이 다년 간 곳으로, 이곳 오씨 선조를 기리는 사당에 김교각에 대한 기록과 함께 남아있다.
비석에는 김교각이 신라인이라고 쓰여 있으며, 김교각이 직접 쓴 시도 전해진데, 그는 시에서 “나는 본디 신라의 왕자로 수행길에 오용지를 만났으며…”하고 읊은 것이 전해 오고 있다.
당시 신라에서 당나라로 유학 간 승려만 해도 200여명이 넘었다. 일반 유학생들까지 합치면 수 백명이 넘을 것이다. 이들은 중국의 언어, 문학, 고나습 등 여러 분야를 배웠고 한국과 중국의 교류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왕자의 신분으로 유학길에 올라 보살의 지위에 오른 김교각 스님은 누구일까?
화성사기에 따르면 김교각은 696년 생이다. KBS는 역사스페셜에서 김교각이 성덕왕의 다섯 명의 아들 중 장남(김수충)이라고 추측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며, 성덕왕 13년(715) 김수충이 당나라로 유학간 이듬해 김수충의 동생인 중경이 태자 책봉 되었고, 어머니인 성덕왕이 폐출 당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그 다음부터는 김수충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역사 기록을 들고 있다.
김수충이 태자 책봉에서 밀려난 데다 어머니마저 궁궐에서 쫓겨나 신라 왕실에서 그가 설 자리가 없음을 알고 그가 선택한 것은 정치적인 암투 대신 수행의 길 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등신불이 되었고, 지옥의 마지막 중생까지 구제한다는 ‘지장보살’이 되었던 것이다.
당시, 김교각은 ‘경주→당항(당진)→영파→남경→무호시(남령현)→양자강 뱃길→구화산’의 경로를 따라 구화산으로 들어 갔을 것으로 보인다.



■ 육신보전
김교각 스님의 등신불을 모신 ‘육신보전’은 가장 중요한 곳이다.
탐방객들이 가장 오래 머무르는 곳이기도 하다. 편액엔 고기 육(肉)자 대신에 달(月)로 표기됐다. 스님에 대한 존업에 대한 표현이란다.
가이드에 의하면, 등신불이란 표현은 정확한 표현은 아니고, 등신불이 맞는 표현이라 한다.
육신보전 건물이 독특하게 지어져 있다.
이층 건물인데, 건물 안에 천장과 맞닿아 있는 7층 석탑이 있고, 7층 석탑 안에 3층 목탑, 그 안에 김교각 스님의 등신불이 모셔져 있다.
문이 잠겨있어 등신불을 직접적으로 참배하진 못했다. 대신 탑 주변에 등신불과 같은 모습의 지장보살상이 들러져 있어, 이 탑을 돌면서 탑돌이를 했다.


■ 화성사
김교각 스님이 세운 구화산 최초의 사찰 화성사로 향했다. 구화산 최초의 사찰인 화성사(化城寺), 김교각이 세웠다고 전해 오는 절이다.
이곳은 현재 역사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박물관에는 스님의 일대기를 그린 그림이 사방으로 둘러져 있다.
김교각 스님이 신라에서 당으로 건너올 때 데리고 왔다는 ‘흰 삽살개’의 형상도 만들어져 있다.
김교각 스님은 중국에 올 때 한국에서 흰 개 한 마리를 데리고 오셨다고 한다. 볍씨와 차씨도 가지고 왔다고 한다.
김교각 스님의 유품으로는 유일하게 신발이 전시되어 있다. 40㎝에 이르는 엄청 커 보이는 짚신이다.
실제 기록에 의하면, 7척의 키에 장정 10명을 상대할 만큼 장사였다고 한다.
이 곳 외에도 고배경대(古拜經臺)가 있다. 이 곳은 김교각 스님이 고행을 하였던 곳으로 교각 스님의 발자국이 새겨져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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