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21일(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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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의 상흔…江하나를 사이에 두고 손에 닿을 듯 스쳐가는 갈수 없는 땅
박종석 화백의 화필여로 <5> 중국 <두만강 황토길을 따라>

  • 입력날짜 : 2014. 07.30. 18:53
박종석 作 ‘두만강’
백두산을 기점으로 15일 동안의 절반은 북상하면서 두만강을 따라 무산, 회령, 종성 교두, 개산툰, 도문, 그리고 러시아 국경선과 가까이 접해 있는 훈춘을 거쳐 아오지 탄광이 보이는 곳까지 길이 547.8㎞를 강을 사이로 금단의 땅 넘보기에 여념 없는 긴장 감도는 여행이었다.

강가에서는 북한군인들 몇 명이 고기를 잡는다.

가는 도중 기차소리가 아득히 들리며 역사에 걸린 김일성 초상화가 쌍안경으로 보니 선명하다. 그 앞 모래 백사장에서 뜨거운 태양 빛도 마다하지 않고 덤블링을 하며 장난치고 노는 십 여 명의 아이들이 우리가 부르는 소리에 곧바로 집합하여 부동자세가 된다. 그리고 우리들을 경계하는 눈치이다. 흥을 깨뜨려 미안해하는 마음으로 발길을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강가에서 낚시를 하는 노인들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 고기를 낚는다 한다.

강폭이 넓고 무역거래의 철교가 보이는 개산툰이라는 조선족 마을 거리에 5일장처럼 시장이 열렸다. 많은 과일이며 옥수수, 야채 푸성귀 등 한산한 시장 풍경이다. 직접 재배해 온 완전한 무공해 자연산으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싼 가격이다. 우리 동포들의 모습은 그 옛날 조선시대의 풍경 속에 사람들처럼 옛스럽고 순박한 표정과 정겨운 표정들이다. 과일이며 야채를 사니 덤으로 듬뿍 더 주는 우리 한 민족들!

‘북녘땅’
강가에 앉아 팔십이 넘으신 곱디고운 할머니와 중년 아주머니, 그리고 아이들 몇 명과 함께 이것저것 근황을 물으며 한 시간 동안 순수하고도 수정처럼 맑은 사람냄새에 푹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헤어지면서 사진 한 컷으로 아쉬움을 담는다.

다시 오르면서 온성, 경원, 샛별군을 바라다보며 지나니 산 위에 횃불 탑이 있고 강가에 김일성 방문 기념비가 아스라이 보인다. 그리고 가는 곳곳마다 “21세기의 태양 김정일 장군 만세”, “김정일 시대를 빛내는 보람찬 투쟁에서 청년 영웅이 되자” 등 산등성에는 경직된 구호들이 눈에 많이 보인다.

또 두만강 폭이 좁은 곳은 개울물 같고, 풍덩풍덩 건너간다면 발목 이상 넘치지 않을 곳이 많다.

군인들의 차량이 비탈길에서 빠져 땀을 뻘뻘 흘리며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표정이 안타깝다.

집단 농장에서 느릿느릿 여유롭게 밭일을 하는 주민들이 몇 십리 길을 터벅터벅 걸어가기도 하고 그 많은 인원 중 자전거로 가는 사람은 한 명 뿐, 쫓기지 않는 모습이다.

중국 땅에서 바라본 북녘 하늘아래의 삶터가 더더욱 호기심 어린 긴장감에서 바라보기에 시간은 쏜살같다.

느닷없는 장대비의 소나기를 만나다 보니 잠시 차의 속도가 느슨해지며 보는 것도 더디어 진다.

화룡을 거쳐 유신, 윤진, 송전, 칠성을 지나 숭선으로 이어지는 두만강 협곡사이로 조선족 부락이 있는데 북녘 땅의 집과 논밭은 왠지 황량한 느낌이다.

숭선 입구에 다다르니 우리 조선족들이 무슨 행사가 있는지 피리와 꽹과리 소리가 흥겹다. 숭성 건너편 해관은 약 30m 거리로 한 명의 총을 맨 경비병 외 대여섯 명은 우두커니 앉아서 있고 우뚝 서있는 붉은 철탑에는 “당의 영도체계를 철저히 지키자”라는 표어가 써있다.

‘숭선에서 바라보다’
우리는 조선족 식당에 들어가 60위안에 한정식과 물천어를 주문하여 먹었으나 그렇게 맛이 있는 편을 아니었다. 식사 후 바로 앞 강물에 손을 적시며 어린 손자를 세수시키며 빨래하는 아주머니와 한담을 나누는데 예전에는 북쪽으로 장사하러 건너 다녔으나 요즘은 그냥 손자 키우는 재미로 산다며 북조선이 기근 들고 먹을 것이 없어서 야간에는 군인들이 넘어와 식량을 요구하면 같은 동포라 조금씩 나누어 먹는데 변방의 군인들은 스스로 자급자족해야 하는데 어려움이 많아 보인단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래 가사도 있지만 황토물이다. 그래도 석양에 지는 강 풍경과 북녘의 자연은 아름답다.

문득 외조부님이 생각난다. 젊은 날 수재 이셨던 외조부께서는 일본에서 대학을 마치시고 독립운동을 하시다 1949년에 월북하셨다. 그 때 외조모님께서는 병환으로 운명을 달리하여 화순 능주에 묻히시고 세 자녀를 고향에 남겨둔 채…. 그래서 나를 위해 평생 기도하신 어머니께서는 가슴 한켠에 묻은 그리움인지? 내성격에 과묵하신 편으로 어린 시절 우리는 왜 외갓집이 없냐는 질문에 묵묵부답이셨다. 시대의 희생인가? 아니면 운명에 의한 선택의 결과인가?

지금 살아 계신다면 100세가 훨씬 넘으셨다 하니 혹이나 북녘에서의 삶은 어떻게 마무리 하셨는지…. 얼굴도 모르는 그 분의 인생 역정이 외손자로써 궁금할 뿐이다.

몇 년 전 어머니를 모시고 금강산에 다녀 올 때도, 이산가족 상봉으로 세상이 떠들썩할 때도 어머니는 그저 무심하신 것 같으셨다. 그러나 왜 궁금하시지 않았겠는가…. 한 핏줄이 사는 땅을 한발도 들여놓지 못하고 멀리서 바라보아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역사의 바퀴는 지금도 험한 고난의 길을 계속 안고 가야 하는지?

하나의 조국 그리고 자유로이 넘나드는 날이 빨리 왔으면 하고 막연한 기원을 가져본다.


kj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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