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2일(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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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도시 입은 마구니 밟고서 왜구 제압 발원…12폭포 아래 물들어가는 山寺
포항 보경사

  • 입력날짜 : 2015. 11.19. 19:23
오층석탑과 적광전. 뒤로 대웅전과 여러전각이 축대 위에 자리해 있다.
제31차 아쇼카 순례단 ‘해설이 있는 사찰순례’ 12월12일(土) 장성 백양사 (문의:062-383-3538)
입동(立冬)이 지났다. 그래도 남녘의 계절은 아직 가을이다. 남도에서 동해 쪽으로 가는 길 내내 가을을 감상한다. 지난 여름, 산천이 얼마나 가물었는지 붉은 단풍은 어디가고 마른 숲만 이어진다. 간간이 꽃처럼 피어있는 감나무의 붉은 감들이 가을남자의 마음을 위로한다.

보경사 일주문. 푸르른 노송들이 한폭의 산수화처럼 아름답다.
포항 내연산(內延山)은 한반도를 호랑이에 비유할 때 등뼈 끝자락(중앙산맥)에 자리해 있다. 그런 연유에서인지 산의 초입에 자리한 보경사는 일주문에서부터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게 한다.

삐뚤빼뚤, 여기저기, 제멋대로 서있는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푸르른 노송(老松)이다. 한 폭의 산수화가 따로 없다. 사찰 진입로인가 했는데 몇 걸음 지나지 않아 도량이 펼쳐져 있다. 문득 소나무 숲이 절 앞마당 정원은 아닌지 착각에 빠진다. 시원하게 쭉 뻗은 나무줄기를 따라 하늘을 바라보니 외지인이라는 긴장된 마음마저 무장해제 당하고 만다. 정녕 이것이 도인들이 사는 세상인가 보다.

근래 들어 어르신들을 위한 1박2일 안내서가 인기라고 하더니 여기가 제격이다. 많이 걷지 않으면서 문화와 자연을 함께 맛볼 수 있으니 말이다.

포항은 왜구의 침입이 많았다. 사천왕이 마구니(생령좌)인 훈도시를 입고 있는 왜구를 밟고 있다.
내연산 보경사는 신라 진평왕 25년(603년) 지명법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중국 진나라에 유학한 지명스님이 귀국하여 왕에게 이르기를 “동해안 명당에 중국에서 가져온 팔면보경(八面寶鏡)을 묻고 그 위에 절을 세우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고 이웃 나라의 침략을 받지 않으며 삼국을 통일할 것이다”고 했다.

스님은 명당을 찾아 동해안을 거슬러 오르다가 해아현(海阿縣, 지금의 청하면)에 이르러 오색구름이 덮여 있는 산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곳은 큰 못이었다. 지명스님은 못을 메워 팔면보경을 묻고 그 위에 금당을 세워 절을 세웠다. 보배(寶) 거울(鏡)을 묻었다 하여 보경사(寶鏡寺)라 명명했다.

흥미롭게도 보경사 설화는 후대로 가면서 이야기가 덧붙여진다. 본래 지명스님은 인도에서 중국으로 불상과 불경을 나르던 백마였다고 한다.

‘보경사 금당탑기’(1588년)에 의하면 중국 후한 때 인도 승려 마등(摩騰)과 법란(法蘭)이 불경과 불상을 백마에 싣고 중국에 처음 불교를 전했다. 이때 십이면원경(十二面圓鏡)과 팔면원경을 함께 가져 왔는데 십이면원경은 낙양성 서쪽 옹문(雍門) 밖에 묻고 절을 세워 ‘백마사’라 했다. 팔면원경은 제자에게 맡기며 “해동 종남산(終南山) 아래 백 척 깊은 못에 묻은 뒤 법당을 세우면 천추만세에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고 했다. 이 거울이 지명스님에게 전해졌고 스님은 사람으로 환생한 후한 때 백마의 후신이라는 것이다.

▶ 가구식 축대 위에 대웅전과 전각들이 짜임새있게 배치되어있다.
어찌보면 보경사 창건설화의 시작은 왜구의 침입에서 시작됐다.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인도에서 전해온 보경을 묻고 보경사를 세운 것이다.

지금도 보경사 천왕문에는 창건설화의 흔적이 남아있다. 천왕문은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들이거주하는 곳이다. 동서남북 사방에서 마구니들을 제압하는 신장이어서 사천왕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사천왕의 발밑을 보면 생령좌라는 마구니를 밟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나라 사찰은 추풍령 이남에는 천왕문의 생령좌가 왜구이고, 이북은 북방 오랑캐이다. 경주 불국사와 같이 보경사 천왕문의 마구니도 자세히 보니 훈도시를 입은 왜구이다. 동해 땅 끝 포항은 일본과 가까이 접해있어 왜구의 피해가 극심했던 곳이다. 사찰에서 왜구의 침입이 없기를 바라는 민중의 염원을 섭수한 것이다.

▲ 오층석탑에 새겨진 자물쇠와 문고리.
보경사는 특이하게 큰 법당이 두 곳이다. 적광전과 대웅전이 그것이다. 산세의 지형에 따라 3단 계단형으로 구성된 가람은 전각을 짜임새 있게 배치했다. 천왕문을 지나 오층석탑과 나란히 자리한 것이 적광전이다.

지난 3월 보물 제1868호로 지정된 적광전은 초석과 고막이 등이 보기 드물게 통일신라 때 건축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법당 전면에 자리한 신방목(信防木)이 눈길을 끈다. 문틀을 지지해주는 신방목은 보통 둥글게 만들어 태극문양을 새기는 데 비해 적광전 신방목은 국내에서 보기 드물게 사자상이다. 동물의 왕 사자는 불교에서 지혜를 상징한다. 적광전 신방목은 삿된 것이 법당에 들어서지 못하게 막고, 부처님의 지혜로 깨침을 얻어가라는 듯하다. 천왕문에도 사자상의 신방목이 있지만 적광전 신방목이 비교적 상태가 양호하다.

적광전 뒤편에 대웅전이 자리해 있다. 후대에 건립된 건물이어서 적광전보다 규모가 크고 치장이 더해졌다. 대웅전 뒤로 돌아가니 커다란 비사리 구시가 놓여 있다. 안내판에 큰 행사가 있을 때 4천명 분량의 밥을 담았다고 쓰여 있지만 한지를 만드는 도구로 추정된다.

적광전앞 신광목 사자상. 목에 방울을 달고 있는 사자가 귀엽게 앉아 방문객을 바라보고 있다.
적광전과 대웅전을 지나 가구식 축대 위에 영산전 산령각 명부전 원진전 등 작은 전각들의 촘촘히 자리해있다.

1400여년 역사를 간직한 보경사는 오랜 세월만큼 수많은 고승들이 상주했다. 그 가운데 중창주 원진국사(1172-1221)의 흔적이 눈길을 끈다.

먼저 1792년 보경사에 주석하던 회관스님이 쓴 사적기에 전하는 이야기부터 살펴보자.

“내가 예로부터 전해오는 말을 들으니 스님이 어느 날 저녁 예불을 드리고 났을 때 낙타만한 호랑이가 눈앞에 나타났다 한다. 스님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내가 너에게 아직 다 갚지 못한 빚이 있는 게로구나. 내 어찌 한번 죽어 주린 네 욕구 채워 주기를 두려워하랴. 다만 너는 내 고기로 배를 불린 뒤 남은 뼛조각을 한갓진 곳에 남겨 두라.’라고 말하니 호랑이는 그 말대로 절 뒤의 산자락에 유골을 버리고 갔으며, 나중에 그곳에 부도를 세웠다고 한다.”

그때는 온산이 눈으로 덮인 겨울이었다. 굶주린 호랑이가 법당 앞에서 울부짖자 원진국사는 호랑이의 허기를 달래기 위해 육신을 공양한 것이다.

원진국사 부도는 보경사 뒤편 산자락에 자리해있다. 아마도 호랑이가 유골을 놓았던 곳인 듯 하다.

호랑이는 한민족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외래종교가 들어오기 전 고대 한민족의 고유신앙은 산신(山神)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산에 사는 신으로 호랑이를 말한다. 불교가 한반도에 전래되면서 토속신앙도 불교에 융화됐다. 사찰에 자리한 산신각이 그것이다. 산신각에는 호랑이와 수염이 긴 노인이 있기 마련이다. 노인은 산신인 호랑이를 의인화한 것이다. 그렇다고 꼭 산신을 할아버지로 표현하지는 않는다. 할머니로 등장하기도 한다. 산신인 호랑이도 암수가 유별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지리산 산신은 할머니로 표현한다. 그래서 지리산 산청 법계사 산신각 산신탱에는 할머니 산신이 조성되어 있다.

수령 400된 탱자나무. 탱자열매가 일반탱자보다 서너배 크다.
보경사를 품고 있는 내연산의 가을은 곱다. 여느 산과 달리 내연산은 물이 많다. 그래서일까. 나라가 온통 가뭄으로 몸살을 앓고 있지만 내연산은 올해도 여여하게 단풍이 곱게 내려앉고 있다. 물이 많고 영남의 금강산으로 불리는 내연산은 유달리 폭포가 많다. 보경사에서부터 계곡을 따라 12개의 폭포가 자리해있다.

개성이 각각인 폭포들 가운데 으뜸은 6번째 관음폭포이다. 동굴사이에 수직으로 떨어지는 폭포수와 구름다리가 어우러져 찾는 이의 심금을 울린다.

조선 진경산수화의 시조로 불리는 겸재 정선은 내연산 12폭포가 금강산보다 아름답다며 연산폭포, 관음폭포, 잠룡폭포를 연이어 그린 ‘내연삼용추도’를 그렸다.

내연산에서 나오는 길에 보광사 오층석탑 앞에 섰다.

1층 몸돌 앞뒤로 자물쇠와 문고리가 눈길을 끈다. 진짜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 듯 조각이 생생하다. 저 안에 깨침의 비결이 있을 터인데…. 어떻게 열고 꺼낸단 말인가.

돌 자물쇠 푸는 열쇠를 화두삼아 발걸음을 뒤로 했다.

해맞이 명소 ‘호미곶’…제철 맞은 대게·과메기 풍성

포항 보경사 가까이에 한반도 동쪽 땅 끝이 있다.
지도에 표기된 한반도의 형상은 마치 호랑이와 같다. 호랑이 등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톡 불거진 꼬리가 나온다. 일제 강점기 때 은근히 한민족을 비하하기 위해 ‘토끼 꼬리’라고 우겼다. 조선 초, 예언가이자 풍수의 대가로 불리는 남사고(南師古)가 이르길 이곳을 ‘범 꼬리(虎尾登)’라 했다. 오늘의 포항 남구 호미곶이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고산자 김정호가 호미곶을 무려 일곱 차례나 답사했다. 포항 호미곶과 울진 죽변곶 가운데 어느 곳이 더 동쪽의 땅 끝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대동여지도에 호미곶이 더 튀어나오게 그렸다. 이것만 보아도 대동여지도는 서양의 지도제작법과 달리 전통기법으로 만들어진 위대한 문화유산임에 틀림없다.
호미곶은 남녘에서 가장먼저 아침해를 맞이하는 해맞이 명소이다. 이곳에 해맞이 광장이 조성돼있다.
2000년 첫 날, 이곳에서 새천년 한민족해맞이 축전이 펼쳐졌다. 이를 기념해 1만 여 평의 부지에 해맞이 광장을 조성하고 다양한 기념조형물을 세웠다. 청동으로 조성한 상생의 손을 비롯해 성화대, 불씨함, 연오랑 세오녀상, 호랑이 조각, 공연장 등이 그것이다. 바다와 육지에 설치된 상생의 손은 서로 마주보는 형상으로 상생과 화합을 상징하고 있다. 또한 불씨함은 변산반도에서 가져온 20세기의 마지막 햇빛과 날짜변경선에 위치한 피지섬, 호미곶 새천년 첫 햇빛 등을 합화하여 안치한 불씨로 각종 국제대회의 씨불로 사용하고 있다.
호미곶 옆 구룡포는 포항의 대표 먹거리인 대게와 과메기가 제철을 맞아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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