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20(일)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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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대∼머리 귀신 형용 적막 옥방의 찬 자리에/생각난 것이 임뿐이라/보고지고 보고지고 한양 낭군 보고지고…’. 판소리 춘향가 중 한대목인 쑥대머리다. 옥에 갇힌 춘향이 쑥대처럼 헝클어진 머리를 숙인 채 부르는 내용이다. 여인의 그리움을 가장 잘 표현한 대목으로 꼽힌다. 판소리에 익숙치 않더라도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을 가락이다. 과거 소리꾼들은 춘향가에 쑥대머리를 넣어 부르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쑥대머리를 우리네 귀에, 가슴속 깊이 새긴 이가 바로 ‘슬픈 곡조의 달인’ 임방울(1904-1961·본명 임승근) 명창이다.
◇일제강점기 폭풍보다 더한 문화충격
임방울은 1904년 전남 광산군 송정읍 도산리 679번지(현 광주 광산구 도산동)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울지 않고 ‘방울방울’ 잘 논다 해 ‘방울’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후에 애칭이 예명으로 굳어졌다.
귀동냥으로 소리를 익힌 그는 12살이던 1916년 박재실 창극단에서 ‘흥보가’를 배운다. 이후 공창식 선생(1918년)과 유성준 선생(1921년)에게 사사했다. 이즈음 서편제와 동편제를 모두 섭렵했다.
그가 판소리계에 공식 등장한 것은 25살(1929년) 때다. 매일신보사 주최 조선명창연주회에서 바로 쑥대머리를 불러 장원을 거머쥐며 명창의 반열에 오르면서다.
어떤 소리꾼과도 비교할 수 없는 목구성과 창작성, 아니리에 능한 그의 쑥대머리는 듣는 이들을 얼어붙게 했다. 폭풍보다 더한 문화충격이었다. 콜롬비아레코드사가 제작한 쑥대머리와 호남가 음반은 120만장이나 팔렸다.
일제강점기였던 이 시절부터 해방, 6·25전쟁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격랑기 속에 그는 단순한 소리꾼을 넘어 민초의 애환을 노래한 가객이었다.
같은 시대 송찬호(1905-1961) 시인이 쓴 시 ‘임방울’의 한 구절은 눈여겨 볼만하다.
“들어보시게, 시절을 뛰어넘은 명창은 한 번 반드시 나타나는 법/우당탕 퉁탕 울대를 꺾으며 저 여울을 건너오는/임방울, 소리 한가락으로 비닷옷을 입은 늙은이/삶이 어찌 이다지 휘몰아치며 도도히 흘러갈 수 있단 말인가”
◇민족·애국주의자로 재평가해야
일제시대 임방울의 주요 공연장소는 화려한 무대가 아니었다. 시골장터나 강변에서 민족의 설움과 한을 노래했다. 1961년 타계하기 6개월 전 김제장터에서 공연 중 피를 토하고 쓰러진 게 그의 마지막 무대였다.
모든 것이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 임방울의 소리는 어떤 희망도 찾을 수 없었던 우리 민족을 웃기고 울렸다.
임방울이 나타나면 남녀노소 할 것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울고 웃으며 박수쳤다. 방향타가 없었던 젊은이들에게 우리의 소리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그를 통해 결집시켰다.
당시 어떤 예술, 어떤 문화도 임방울의 가락 만큼 우리 민족을 결속시킨 것이 없었다. 해방 이후에도 임방울의 소리는 나라를 사랑해야 한다는, 민족을 사랑해야 한다는 정신의 출발점이었다. 또 다른 의미의 민족주의자요, 애국주의자로 재평가해야 하는 이유다. 2000년 정부가 임방울에게 ‘은관문화훈장’을 추서한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김중채 (사)임방울국악진흥회 이사장은 “그의 존재가 단순히 소리꾼으로만 평가받아서는 안된다”며 “1940-1950년대는 민족사적으로나, 판소리사적으로나 가장 어둡고 쓰라린 기간이었다. 스스로 판소리 문화의 사각지대에 살아야 했던 임방울 선생은 민중들의 한스러운 정서를 가장 민감하게 파악할 수 있었던 가객이었다”고 강조했다.
◇‘임방울국악제’ 예술혼 계승
어찌 보면 전통과 근대가 자리를 교체하는 혼돈의 시절, 우리 소리의 완성을 위해 몸부림친 ‘광대’로 보는 게 객관적인 평가다. 그같은 예술혼은 지금도 잔잔하게 이어지고 있다. 그 역할은 (사)임방울국악진흥회의 몫이다.
지난해 18회 행사를 치른 ‘임방울국악제’는 명실상부한 국내 최고 권위의 판소리 경연대회다.
임방울국악제의 위상은 학생부 수상자에게 주어지는 대학입시 가산점에서도 드러난다. 임방울국악제가 30점, 수십여년 전통의 전주대사습이 28점, 나머지 대회가 26점이다. 그만큼 임방울국악제가 심사의 공정성과 수준 면에서 국악계의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이야기다.
광주시와 (사)임방울국악진흥회는 지난해 11월 임방울국악제의 첫 해외진출 공연을 성공리에 마무리하기도 했다. 일본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시에서 역대 임방울국악제 수상자들이 쑥대머리 등의 공연을 선보였다.
또 안순일 전 광주시교육감의 정책추진에 따라 일선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판소리를 가르치고 있다. 광주에서 학교를 나오면 누구나 판소리 한대목은 부를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전설과도 같은 임방울의 쑥대머리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지역민의 정서 속에 오롯이 자리잡아가고 있다./특별취재반
“국악인구 저변 확대 힘쓰겠다”
김중채 (사)임방울국악진흥회 이사장
“임방울 선생의 애국·애족정신과 문화사적 업적을 잇기 위해서는 임방울국악제의 발전과 국악인구 저변 확대가 가장 중요합니다.”
(사)임방울국악진흥회 김중채 이사장은 임방울국악제의 투명성 확보와 행사 격을 높이는 데 재단의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이를 위해 그동안 시행했던 종합평가제와 심사참관제, 심사위원 추첨제, 심사회피제 등을 더욱 강화할 계획이다.
김 이사장은 “국악계에 만연된 인맥, 학맥 등의 폐단을 근절해야 제대로 된 인재를 발굴할 수 있고 더욱 많은 사람들이 판소리에 애정을 가질 수 있다”며 “앞으로 임방울국악제 출신 명창들이 국악계를 주도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임방울 선생의 문화사적 의미에 대해 그는 “임방울 선생은 소박하고 웅장한 동편제와 섬세하고 애절한 서편제를 통합했다”며 “판소리가 핍박받던 시절 그가 실천한 창조적 예인 정신이 빛나는 대목”이라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임방울국악제가 현재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광주시와 조선일보의 지원이 가장 컸다는 게 김 이사장의 생각이다.
실제 광주시는 매년 임방울국악진흥회의 운영비를 지원하고 있다. 지난해 취임한 강운태 시장도 임방울국악진흥회의 활동에 대한 지원 확대를 약속했다.
조선일보의 경우 임방울 선생과 방일영 전 조선일보 회장과의 인연을 계기로 매년 임방울국악제에 5천만원을 지원하고 있다. 임방울 선생은 생전에 ‘절친’인 방일영 전 회장의 자택에 6년간 거주한 바 있다. 타계했을 때도 상여가 조선일보사 앞에서 한동안 멈줬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지난해 성공리에 마친 일본 공연도 앞으로 매년 1-2회 정도 계획하고 있다. 올해에는 동포들이 많이 거주하는 요코하마에서 임방울국악제 수상자들의 공연을 타진하고 있다.
김 이사장은 “오는 3월께 진흥회 사무실을 남구 구동 빛고을문화관으로 옮기고 임방울 선생 기록전시관을 설치할 계획”이라며 “임방울 선생의 일대기를 알리고 다양한 국악교실을 마련하는 등 시민들이 자연스럽게 국악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전통문화예술은 유형으로 투자하고 무형의 자산을 얻어내는 데 목적을 둬야 한다”며 임방울국악진흥회의 운영방향을 밝힌 뒤 “광주시민들의 정서 속에 흐르는 판소리, 국악에 대한 사랑은 결국 임방울 선생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특별취재반
▲이경수 특집기획부장 ▲오성수 특집기획부 팀장 ▲김재정 사회부 차장대우 ▲김기식 사진부 차장대우 ▲정다운 문화여성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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